|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
그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였던 미셸 푸코는 자신의 동료 질 들뢰즈(1925~1995년)를 놓고서 이렇게 얘기했다. 들뢰즈 자신은
정작 이 말을 농담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그의 20주기를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푸코는 아끼는 동료의
작업을 놓고서 놀랍도록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1995년 11월 4일,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말 그대로 '홀연히'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이미 생전에 현대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들뢰즈는 세상을 뜨고 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철학을 넘어서 문학 비평,
사회학, 인류학 등 새로운 사유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고 있다.
당장 세계 곳곳에서 들뢰즈의 20주기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다. 마침 프랑스 문화원도 그의
20주기를 기념해 생전에 그가 남긴 거의 유일한 인터뷰 동영상 <질 들뢰즈의 A to Z> DVD의 한국어판을 펴냈다.
그의 제자 클레르 파르네가 작업한 이 인터뷰 동영상은 그의 삶과 철학에 다가가는 아주 중요한 경로로 알려져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국내 최고의 들뢰즈 권위자로 꼽히는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가 오는 4월 28일(화요일)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 강연도 연다. 서 교수는 이 강연에서
<질 들뢰즈의 A to Z> 동영상의 중요한 부분을 청중과 함께 보면서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전달할 계획이다.
프랑스 대사관과 프랑스 문화원에서 제안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BK21 플러스 사업팀이 화답하면서 성사된 이번 강연은 대학 안에서
축적된 지식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하는 한 본보기를 보여줄 예정이다. 이미 서동욱 교수 등은 지난 1월과 2월에도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연속 강연을 개최해 매회 350명이 넘는 청중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 냈었다.
<프레시안>은 국내에서 처음 들뢰즈 20주기 행사를 개최하는 서동욱 교수를 만나서 들뢰즈 철학 더 나아가 프랑스 철학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물었다. 마침 인터뷰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진행된 터라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이후에 철학 더 나아가 한국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지로 이어졌다.
지난 4월 10일 강남구 신사동의 민음사 회의실에서 약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전문을 2회에 걸쳐 그대로 싣는다. 인터뷰는 강양구 기자가, 정리는 강양구·이명선 기자가 함께 했다.
들뢰즈 20주기 기념 강연 '철학자 들뢰즈를 영상으로 만난다!'
일시 : 4월 28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 서강대학교 J관 302호.
강사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철학과)
참가비는 없으며, 강연 뒤에는 추첨을 통해 <질 들뢰즈의 A to Z> DVD와 서동욱 교수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펴냄)을 증정합니다. 
사후 20년, 다시 들뢰즈가 왔다
프레시안 : 오는 28일에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20주기를 기념하는 강연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듣고서 '아, 벌써 20년이나 지났네!'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죠. 이제 세계 곳곳에서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릴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번 강연이 그 시작입니다. 이런 강연을 준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서동욱 : 지난해 저도 공동 저자로 참여했던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반비 펴냄) 출간을 계기로 서강대학교 BK21플러스 사업팀이 연속 대중 강연을 기획했어요. 대학에 누적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해 같이 나누자는 취지였죠. 그런데 매회 350여 명 이상의 청중이 참여하는 열띤 반응에 크게 놀랐습니다. 강의실을 계속해서 큰 곳으로 옮겨야 할 정도였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강연에 오신 분 가운데 프랑스 대사관의 수석참사관이자 공관차석인 에티엔 롤랑-피에그(Etienne Rolland-Piegue) 씨가 계셨는데, 나중에 들뢰즈에 관한 강연을 해보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했어요. 철학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저 또한 들뢰즈 20주기를 맞는 해라 의미 깊은 행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기에, 프랑스 대사관의 에티엔 롤랑-피에그 씨, 프랑스문화원의 다니엘 까펠리앙(Daniel Kapelian) 씨(뉴미디어 담당), 레티시아 파브로(Laetitia Favro) 씨(출판 진흥 담당)와 함께 들뢰즈의 삶 그리고 철학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이번 강연을 공동으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프랑스 문화원이 들뢰즈 20주기를 기념해 <질 들뢰즈의 A to Z> 인터뷰 동영상을 국내에서 DVD로 출시하기도 했기에, 겸사겸사 들뢰즈 철학을 회고하기에 좋은 기회가 이렇게 마련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과문한 탓인지 이 인터뷰 동영상의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인터뷰더라고요?
서동욱 : 철학자 사이에서는 유명한 인터뷰 동영상입니다.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서 세계 곳곳에서 출시가 되었죠. 들뢰즈 철학을 공부하는 연구자, 학생이라면 꼭 거쳐야 할 필수 코스죠. 사실 특별한 인터뷰 동영상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항상 방송 출연을 거부해 온 터라서 그에 대한 공식적인 영상 기록은 많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의 말년에 제자 클레르 파르네가 영상 인터뷰를 제안했고, 웬일인지 들뢰즈가 이 인터뷰 작업에는 응했습니다. 물론 죽고 나서 공개하는 걸 전제로요. 그래서 여덟 시간 분량의 인터뷰 동영상이 세상에 탄생했죠. 실제로 이 인터뷰는 1995년 11월 4일, 그가 타계하고 나서 공개가 되었습니다. 제가 1996년에 유학을 떠나 벨기에 루벵 대학에 도착했는데, 유럽의 공영 예술 채널 아르떼(Arte) TV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방영하고 있더군요. 당시 들뢰즈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철학자의 모습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레시안 : 아까 이 인터뷰가 들뢰즈의 철학에 접근하는 굉장히 중요한 경로라고 얘기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일단 형식이 굉장히 독특하더군요.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에 따라서 던져진 화두에 들뢰즈가 응답하는 방식이니까요. A의 동물(Animal)부터 Z의 지그재그(Zigzag)까지요.
서동욱 : 그런데 들뢰즈가 단지 던져진 화두에 답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순서를 무시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기 철학과 삶 전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들뢰즈 철학의 다양한 모습 거의 전부와 들뢰즈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 대부분이 바로 이 다큐멘터리에 모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우리는 심지어 들뢰즈가 좋아하는 음식(상당히 특이한 편인데, 무엇인지는 DVD에서 직접 확인하셔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고, 그가 좋아하는 비외른 보리 같은 테니스 선수를 어떻게 철학적으로 분석하는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들뢰즈는 '테니스의 프롤레타리아화'에 대해서도 이론을 만들지요. 요컨대, 철학자 스스로 자기 철학의 전모와 삶의 기록을 남긴 기록적 가치가 굉장히 높은 것이죠.
프레시안 : 들뢰즈의 달변도 굉장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의 철학이 담긴 글은 정작 난해하기로 유명한데요.
서동욱 : 그렇죠.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Anti Oedipus)>(김재인 옮김, 민음사 펴냄) 같은 유명한 책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대학 사회에서는 강의 잘하는 교수로 유명했어요. 오죽하면 들뢰즈가 이렇게 회고할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강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또 대중의 호응도 컸습니다. "강의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준비도 많이 했고. 그 때문에 은퇴할 때는 더 이상 준비를 안 해도 돼서 기쁘기도 했다." 당연히 들뢰즈는 중요한 내용을 말로 잘 전달했어요. 이런 점이 이 인터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놀랍도록 쉬운 표현과 명료한 설명 방식을 통해서 복잡한 들뢰즈의 철학을 그 스스로 잘 정리해 주고 있죠.
프레시안 : 사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잖아요. 그의 철학에서 문학 비평이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들뢰즈는 글보다 말로써 대중에게 훨씬 더 호소력 있게 다가갔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서동욱 : 맞아요. 들뢰즈도 다큐멘터리의 한 인터뷰에서 "글은 깨끗하고 말은 더럽다"고 언급하죠. 왜냐하면, 말은 듣는 사람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유혹(seduction)'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꼭 전달해야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귀를 열도록 유혹에도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죠. 정작 들뢰즈는 그런 유혹하기를 상당히 성공적으로 해낸 것 같아요.
프레시안 : 설명을 듣고 보니 굉장히 의미 있는 인터뷰가 그의 20주기를 기념해서 우리 문화계에 소개된 것이군요.
서동욱 : 20세기의 영상 기술 덕분에 성취된 일이죠.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만약 영상 기술이란 조건만 마련되어 있었다면, 플라톤도 들뢰즈와 똑같은 작업을 시도했을 것 같아요. 사실 플라톤의 <대화>가 곧 그 당시의 인터뷰 동영상이거든요. 그냥 철학을 추상적으로 남겨 놓은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육체를 가진 사람의 말을 통해서 철학을 보여주고자 시도했으니까요. 플라톤의 편지 가운데, 그의 <대화>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듯한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 있어요. "이것들에 관한 플라톤의 저작도 전혀 없으며 없을 것이고, 현재 이야기되는 것들은 아름답고 젊어진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것입니다." (<편지들>(플라톤 지음, 강철웅 외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소크라테스의 생생한 육성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플라톤의 목적이었다면, 이미 플라톤은 오늘날의 영상 기술이 없었을 뿐이지 내심 인터뷰 동영상과 같은 작업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이 인터뷰 동영상은 플라톤과 같은 그런 철학적 의도를 당대의 기술과 결합해 실제로 구현했다는 철학적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프레시안 : 마침 들뢰즈 20주기라서 새삼 떠올려 본 것이긴 합니다만, 장폴 사르트르-미셸 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프랑스 철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게 대충 따져 봐도 60여 년 정도 됩니다. 1990년대에는 프랑스 철학 열풍이라고 불릴 법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 요즘은 프랑스 철학 열기 자체는 식은 것도 같고요. 프랑스 철학이 한국의 인문학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이런 질문에 답해볼 정도로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서동욱 : 해방 훨씬 전까지 지평을 넓혀보면 60여 년 이상이죠. 프랑스 철학은 전후의 사르트르 열풍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간 우리 지성계와 오랜 시간 동반자 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지난 세기, 지금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우리 지성계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외국 학문을 수동적으로 수입하는 것을 자의식을 가지고 극복하는 것이죠. 그러니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과 같은 과제 자체는 분명히 맞고, 또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외국 학문은 우리가 새롭게 생각할 힘을 얻도록 자극하는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사실 들뢰즈 자신이 이런 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죠. 들뢰즈의 철학은 선배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게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따져보면 바뤼흐 스피노자(네덜란드)나 프리드리히 니체(독일) 같은 외국 학문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도 들뢰즈는 외국 문학인 영문학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죠. 허먼 멜빌이나 윌리엄 포크너 같은 미국 작가로부터 자기 사상의 영감을 이끌어내지요. 물론 유럽 지식인끼리의 교류와 동서양의 교류라는 건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는 외국 학문을 파트너라는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60년이 넘도록 오랜 시간 독서를 통해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프랑스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죠.
프레시안 : 잠시 딴죽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프랑스 철학자들이 사유의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한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과연 그들의 철학이 우리의 사유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자는 대중도 이름을 알 정도로 스타로 군림했죠. 하지만 그들의 사유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려서 새로운 사유를 생성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는지는 의문입니다.
서동욱 : 아까 질문 가운데 귀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철학 열기 자체는 식은 것도 같다"는 언급이었죠. 오히려 그렇게 열기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사라진 것 자체가 하나의 긍정적인 징후가 아닐까요? 더 이상 프랑스 철학이 깜짝쇼처럼 등장했다 금세 사라지는 수입품이 아니라는 뜻이죠.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자의 책은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프랑스 철학이 관심을 끄는 외국 상품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본래 도구라는 것은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늘 곁에 있는 것이잖아요. 프랑스 철학이 바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에 도둑이 들면 주위에 있는 무엇이라도 도구로 삼아 손에 들고 휘둘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직면한 절실한 문제가 우리 주변의 학문을 필연적인 도구로 만드는 것이지, 그 태생이나 기원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프랑스 철학이라는 이 도구로 우리가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을지는 저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의 과제지만요.
프레시안 : 얘기를 듣고 보니, 작년의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연속 강연이 매번 수백 명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을 그 증거로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프랑스 철학이 지금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서동욱 : 프랑스 철학이 우리 사유의 파트너로서 가장 공헌한 바가 무엇일까요? '정치·사회 문제에 철학이 늘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준 것이죠. 정치·사회·경제·문화 같은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하나의 고도로 사변적인 영역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늘 우리 삶의 현실에 눈을 뜨고 있는 철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 것이죠. 이런 프랑스 철학의 핵심이 우리 삶의 조건을 비판적·반성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관습적·인습적인 문제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가속도를 붙게 한 것이 프랑스 철학이었죠. 들뢰즈의 철학도 그 가운데 하나고요. 예를 들어, 들뢰즈의 주저 <안티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증오하게 하는 '순혈적인 권위' 같은 것을 반성해보고, 교정하는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옭아매는 우리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미시 권력이니까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면, 진보적인 사람이나 보수적인 사람을 막론하고 사적인 공간에서 의식 없이 자행해 왔던 폭력, 예를 들어 가부장적 폭력, 남성 우월주의 같은 문제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혹은 그 성찰에 가속도를 붙인 것이 바로 이런 들뢰즈의 철학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철학을 통해서 이런 미시 권력의 작동 방식을 파악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요. 다른 맥락입니다만, 예술 작품 특히 문학 작품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놓고서도 아주 유용한 도구를 제공해 준 것이 사르트르부터 들뢰즈까지의 프랑스 철학이었습니다. 우리 문학이 시간을 때우는 읽을거리, 엔터테인먼트로 주저 않지 않고 늘 사회를 향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온 것도, 한 축에서 보자면 프랑스 철학적 정신을 지닌 비평 작업에 문학이 호응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프랑스 철학과 한국 문학은 동반자적 협업 관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들뢰즈, 철학사를 전복한 철학자
프레시안 : 이제 좀 더 초점을 들뢰즈의 철학에 맞춰 보죠. 그의 철학이 철학사에서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서동욱 : 들뢰즈는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벗어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 먼저 철학사의 보편적인 사유 방식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봐야겠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서구 기독교에도 뿌리 박혀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초월'의 영역이죠. 다른 하나는 헤겔에서 볼 수 있듯이 주체가 스스로를 극복해야 할 장애로 여기고 뛰어넘게 하는 '부정'의 힘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 초월성과 부정성이 들뢰즈에게는 전무합니다.
프레시안 : 사실 그 두 가지는 긴밀히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부정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초월'의 영역, 이런 식으로요.
서동욱 : 맞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가지 사유 방식은 플라톤에서 헤겔, 또 오늘날까지 철학사를 풍요롭게 해주었죠. 그러다 보니 이런 초월성과 부정성을 포기하면 철학자로서는 자칫 사유의 입지가 좁아지는 어려운 국면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들뢰즈는 이 둘을 포기하고 남은 '내재성'만으로도 정말로 빼어나고 풍요로운 새로운 사유의 터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죠.
프레시안 : 내재성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서동욱 : 내재성은 '부가적인 차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어져 있는 것 자체에 대한 긍정을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초월적인 것'에 대비되는 '현세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고요.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철학사에서는 현세적인 것을 초월적인 것보다 부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이것은 따져 보면 주어진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살고 있는 삶 대신에 저편에 있는 다른 삶을 위해서 사는 것이죠. 들뢰즈는 바로 이런 초월적인 혹은 부가적인 차원을 철학에서 없애버렸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조건에 충실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할 길을 열었죠. 이렇게 초월성과 부정성이라는 오랜 서양 철학의 유산과 결별한 점이야말로 들뢰즈 철학의 철학사적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서 아주 다양한 성취를 보여줍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나 마르셀 프루스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 등 우리 곁에서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예술 작품에 대한 그의 독특한 철학적 주석은 그의 내재성의 철학이 빛나는 부분입니다. 가령 카프카 같은 경우는, 아버지의 존재가 짙게 드리워진 탓에 '초월적인 법'의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은 유혹을 아주 많이 불러일으키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이라는 소수자 문제를 제기하며 카프카를 대담하게 내재성의 관점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내재적 영역 안에서 기존의 코드를 깨트리고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나가는 일을, 자기를 둘러싼 문화의 어느 자리에도 안착하지 못한 카프카의 소수 언어가 해냈다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앞에서 들뢰즈가 연구했던 과거의 철학자 이야기, 가령 스피노자와 니체 이야기를 잠깐 했었습니다. 들뢰즈는 철학사 속의 철학자들을 많이 연구했던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의 철학사 연구란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서동욱 : 바로 그 대목이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입니다. 들뢰즈는 사람들이 덮어뒀던 과거의 철학책을 다시 읽음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피노자와 니체였죠.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서 철학사에서 잊힌 의미 있는 철학자를 다시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게 됐죠. 그 덕에 철학의 사유는 더욱더 풍요로워졌고요.
프레시안 : 지금 우리가 아는 스피노자와 니체는 들뢰즈 시대 이전과 이후가 많이 다르죠?
서동욱 : 정확한 지적입니다. 만약 철학사에서 과거의 철학책을 다시 읽게 한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를 꼽자면,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 철학사를 다시 쓴 사람이 있다면 마르틴 하이데거와 들뢰즈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철학의 기원부터 플라톤까지를 자기 관점에서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 근세까지를 자기 철학에 이르는 과정으로 정리한 헤겔. 기왕 철학사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욕심을 내보죠. 오늘날의 시점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들뢰즈를 읽고 또 읽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현대 철학자 중에서 들뢰즈만큼 철학의 중요한 영역과 주제를 버리지 않고 자기 철학 안에서 계승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존재론'을 들 수 있죠.
프레시안 :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같은 질문 말이죠.
서동욱 : 맞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현대 철학은 많은 경우 바로 그런 질문과 연결되는 존재론을 더 이상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존재론을 새롭게 구축하기보다는 오히려 회의를 갖고 해체하는 작업이 더 눈길을 끌었죠. 그런데 들뢰즈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틀 짓고 또 삶의 근간을 이룬 서구의 유산인 이 존재론과 같은 전통적 영역을 버리지 않고 쇄신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존재론 외에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철학의 기본 주제가 있습니다. '지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얻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지식의 문제(인식론),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즉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실천 철학,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미학의 문제 등. 들뢰즈는 바로 이런 고전적인 철학의 영역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사유 속으로 끌어들여 하나로 엮어낸 철학을 내놓았어요. 즉, 들뢰즈는 세계 전체를 전면적으로 자기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데 성공한 드문 철학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거장'이라는 칭호가 부여될 수 있는 철학자라 할 수 있겠죠.
프레시안 : 이렇게 얘기를 듣고 보니 욕심이 납니다. (웃음)선생님이 보시기에, 지금의 시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을 대표할 만한 개념이 뭐가 있을까요?
서동욱 : 그런 어려운 질문은 반칙입니다. (웃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지식-존재-실천의 영역에서 하나씩만 꼽겠습니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기호', 존재의 영역에서는 '차이', 실천의 영역에서는 새롭게 쇄신된 '욕망'…바로 이 세 가지가 들뢰즈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한 번 더 반칙을 하자면 지금 독자를 위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시면 어떨까요? (웃음)
서동욱 : 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가봅시다. 기호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미지의 어떤 것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바로 이 기호의 의미를 이렇게 흥미로운 방식으로 알려주죠. 가령 남녀 간의 연인 관계에서 절실하게 필연적으로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미지의 어떤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애인의 거짓말입니다. 애인의 거짓말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당혹감, 배신감, 궁금함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 이면의 진실을 찾고자 나서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지식은 좋은 것이다. 참된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니 참된 것을 한 번 찾아보자' 이런 식으로 미리 준비된 마음가짐에 따라서 진실을 찾는 게 아닙니다. 마치 애인의 거짓말처럼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밖으로부터 강요받고서야 진실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과정 자체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부딪쳐 나가는 몸과 마음을 닦는 도야(陶冶)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들뢰즈는 기호 개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결코 삶과 떨어진 것이 아닌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그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셈입니다.
프레시안 : 다음은 차이죠?
서동욱 : 이 개념에서 특히 들뢰즈의 반(反) 플라톤주의가 두드러집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플라톤은 현세를 초월한 이데아를 상정하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범적이고 원형적인 동일성을 가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데아를 상징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름 즉 차이야말로 오히려 세상의 존재를 설명하는 근본 개념이라고 주장했죠. 이런 차이에 대한 강조는 곧바로 들뢰즈의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인 욕망과 연결이 됩니다. 이 개념은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피력되고 있는 이론입니다. 이 욕망 역시 초월성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욕망을 어떤 근본적인 것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채워 넣으려는 갈망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전형적인 플라톤 식 사고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초월적이고 모범적인 것을 상정하고 현재를 결핍된 상태로 가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들뢰즈는 욕망이 사실은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생산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엔 이런 욕망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의 삶을 살도록 하는 추동력이고 더 나아가, 사람들 간의 관계 또 세상을 바꿔가는 힘이죠.
|
지금 한국의 인문학은 어디로 가는가?
프레시안 : 사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프랑스 철학에 대한 관심은 다소 기이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최근 한국의 독서 시장의 상황을 보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습니다. 소설도 국내소설은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죠. 비평의 죽음이 얘기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좀 더 얘기를 해보면, 한국 사회처럼 논픽션이 나오지도 않고 또 대중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사회도 드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논픽션이 외면 받는 상황이니, 당연히 그 작동 방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과학이 주목받을 리 없죠. 사회과학이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은 지도 정말로 오래되었죠.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그나마 철학 에세이 같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죠. 혹시 이렇게 철학 에세이 같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현상은 구체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말랑말랑한 에세이로 포장된 추상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퇴행의 징후는 아닐까요? 철학자로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서동욱 : 프랑스 철학뿐만 아니라 동서양 철학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는 어떤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과연 그게 현실을 외면하는 퇴행의 징후일까요? 혹시 복잡다단하게 얽힌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싶은 통찰력에 대한 목마름의 표현이 아닐까요? 수박 겉 핧기 식이 아니라 세상과 본격적으로 대면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지금의 독서 시장에서 철학을 내세운 책들이 각광을 받는 현상 자체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독자든, 저자든, 출판사든 '당장 무엇인가를 수확하자'는 조바심을 버려야 할 것 같아요. 뭔가 당장의 성과에만 집착하다가는 금방 황폐해질 게 뻔합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런 상황을 추동한 문제의식이 무엇인가, 그 이면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죠.
프레시안 : 그런데 인문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 철학 빼곤 다른 분야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한 번쯤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문·사·철을 대표했던 문학, 즉 시, 소설, 비평이 예전처럼 대중의 호응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장 선생님께서는 시와 비평의 창작자이기도 합니다.
서동욱 : 시, 소설, 비평이 예전처럼 호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죠.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시의 경우는 제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좋은 시가 쏟아졌던 시기가 도대체 있었나' 하고 생각할 만큼 수준 높은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좋은 시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과거 '국민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전체가 향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작품은 등장하고 있지 않죠. 어떻게 된 사정일까요?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난도의 공예품으로서 시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는 수준 높은 문학적 성취를 얻은 대신에, 공동체적 보편성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죠. 아쉬운 일이지만,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할 성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길을 찾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시에 불어넣어진 에너지는 아직 정점을 치진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어떤 색깔의 풍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프레시안 : 소설의 경우는 어떤가요? 한국 소설의 성취에 대한 회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서동욱 : 소설의 경우는 전(全) 지구화된 독서 시장이라는 물적 조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외국의 가장 좋은 작품이 실시간으로 국내 독자의 탁자 위에 오르고 있죠. 그러니 한국 소설 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작품을 써내는 전 세계 작가와 동일한 시장 안에서 작품을 써야 하는 환경과 맞닥뜨린 셈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을 대표할 뿐 아니라 소설 문학 자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현대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핀천의 경우가 그렇죠. 그는 탁월한 학자와 예술가의 노동력을 모두 지닌 채 그 진지한 탐구력과 인내심을 가동시키며 엄청난 공부와 상상과 대담한 가설을 결합해 작품을 써냅니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한 평생 동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핀천의 작품을 우리와 관계없는 외국의 작품이라고 여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왜냐하면, 그가 공부하고 연구해온 세계가 곧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독자 입장에서 더 이상 그의 소설은 우리의 운명과 직접적으로 상관없지만 마음을 끄는 외국의 읽을거리가 아니라, 바로 독자 자신의 인생의 비밀을 푸는 굉장한 열쇠로서 손 안에 쥐어진 셈입니다. 사실상 이제 전 지구적인 모든 독자와 모든 작가가 한꺼번에 들어 있는 단 하나의 세계, 어느 방향에서나 다 들여다보이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의 맹점 때문에 조개 속 진주처럼 숨었다가 가치가 누적된 채 어느 날 나타나는 문학의 보물이나, 주류의 유통 구조 바깥에서 갑자기 출현할 진귀한 개성을 지금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주 진귀한 우연성, 거의 관념에 불과한 우연성이 되었죠. 출판사의 연출에 의해서나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뭐 얘기하다 보니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았군요. 그냥 대답의 환경 정도를 얘기한데 만족할까 합니다.
프레시안 : 시, 소설의 형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평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태는 정말로 유감입니다.
서동욱 :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비평의 황금시대에 학생 시절을 보낸 저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좀 과장하는 측면이 없지는 않겠으나,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지성계는 사실 비평계밖에 없었어요. 물론 지성계의 어느 영역이건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을 반성과 비판에 시달리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외로운 근대 학문으로 태어나, 자의식 속에서 한 정신의 독자적인 역사를 구축했으며, 또 일반인의 실시간적 읽을거리인 시, 소설을 그 역사에 매개시키면서 생명력을 얻었던 영역은 비평뿐이었습니다. 대학 안에서 누적된 지식을 사회 문제와 줄곧 맞대결시키며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고, 작가와 시인이라는 이름하에 새롭게 출현하는 떠돌이 젊은이들의 낯선 발언에 역사적 의미와 독보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을 비평 말고 다른 무엇이 해왔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령 철학의 경우는 어떨까요? 한국 학자들의 철학적 스칼라십이란 정말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또 오늘날도 긍정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개개인을 초월하는 한 정신의 자의식이 구현하는 독자적인 역사를 꾸며내는 일을 충분히 하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물론 이것은 마땅히 되어야 할 일을 못 이룬 스캔들이 절대 아니며, 가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개별적인 천재의 출현으로는 해결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사유의 환경입니다. 어쨌든 이런 사태에 대한 자의식이 초조감으로 발현될 때는, 독자적인 사상에 대한 욕구로 심심치 않게 표출되곤 하지요.
프레시안 : 그야말로 '비평가의 시대'가 있었죠. 가장 빛나는 한국 지성 역시 비평계가 배출했고요.
서동욱 : 우리나라의 지성을 상징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대부분이 바로 비평가였죠. 그런데 지금 더 이상 비평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어쩌면 비평의 대상이 되는 시, 소설과 같은 한국 문학에 관심이 시들해진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현상이겠죠. 또 비평을 경유해서 새로운 사상내지 외국 이론을 접하던 방식이 더 이상 주도적이지 못하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평이 과거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독자들의 지성적 관심을 매개하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관심이 최근 철학 에세이에 얼마간은 반영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지금의 분위기를 잘 키운다면, 새로운 한국적 지성의 출현을 기대해 볼 수도 있겠죠. 앞에서 독자, 저자, 출판사 모두가 함께 더 나은 방행을 모색해봐야 한다고 말했던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정말로 과거 비평가의 시대를 넘어선 '철학자의 시대'가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걱정되는 모습은 없나요? 앞에서 제가 먼저 불안감을 토로하긴 했습니다만.
서동욱 : 솔직히 말하면 아주 많죠. (웃음) 당장 앞에서 지적한 대로 피상적인 관심의 충족에 머무를 수 있으니까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라는 암소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등에 역할을 하겠다'고 얘기하고 나섰다가 아테나 시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 죽었던 기원전 수백 년 전부터 철학은 우리를 평균적인 일상성 속에 머물지 못하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철학 역시 근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그런 역할을 담당해야죠. 그러니 철학 책을 읽으며 어려운 개념을 지적으로 향유하고서, 단지 다시 제자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란 궁극적으로는 심리적으로, 지적으로 더 어려운 삶의 과제를 하나 더 만드는 일 같습니다. 사실 우후죽순 생기는 인문 강연을 놓고서도 똑같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
프레시안 : 그러고 보니 지성의 죽음, 대학의 죽음이 얘기되는 시대에 정작 인문 강연이 유행하는 것도 독특한 세태입니다.
서동욱 : 맞습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찬밥 신세가 됐는데 밖에서는 왜 인문 강연에 대한 수요가 이렇게 높은지, 이런 역설적인 상황의 원인을 대학 안팎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죠. 가장 큰 원인은 대학 안에서 지식을 유통하는 방식을 평가하는, 현재의 제도가 채택하는 규약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가령 그 규약에 호응하는 천편일률적인 논문 생산 방식은 연구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연구를 표현하는데, 그리고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얻는데, 모두 근본적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듯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논문이 담고 있는 지식이 과연 대학 안팎의 학생과 대중에게 필요한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정작 대학 밖에서 인문학을 갈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대학 밖의 인문 강연의 인기로 나타났습니다. 이 상황도 앞으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키워야 합니다. 대학 밖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한 인문학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자 공동체에게 새로운 강연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현상이죠. 지식에 대한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장이 열렸다고 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복지를 시민이 사회 안에서 요구하듯이, 지식에 대해서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으로서의 인문 강연, 시민운동으로서의 대중 강연이라는 관점을 좀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레시안 : 저로서는 한국의 대학과 그 구성원들이 왜 자꾸 안으로만 쪼그라드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학교 안팎의 울타리를 허물고 대학을 지역 사회의 시민 공동체 교육 기관으로 거듭나게 할 수도 있잖아요. 당장 서울의 몇몇 대학이 시민과 호흡하는 한국 지성의 요람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을까요?
서동욱 : 대학 구성원을 어느 범위로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꺼번에 욕하시면 안 됩니다. (웃음) 대학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모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시도하는 들뢰즈 20주기 기념 강연 역시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시도된 것이죠. 아직은 실험과 모험의 과정입니다만.
세월호 이후, 철학은 가능한가?
프레시안 : 지금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문득 들뢰즈라면 세월호의 비극에 어떻게 응답할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동욱 : 글쎄요. 이런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너무도 명확한 것이라 굳이 들뢰즈나 다른 지성을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구나 스스로 응답하는 법을 알고 있는 문제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세월호 참사는 그냥 흘러가 버리지 않는 사건이죠. 얼마 전에 나온 <세계의문학> 2014년 겨울호(제154호)에 이에 관한 철학 에세이('온도의 공동체')를 하나 쓰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에세이를 쓰면서 고민했던 내용을 공유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세월호 비극을 증언하는 수많은 영상과 메시지를 접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어머니의 호소를 담은 영상이 인상 깊었지요. "조금이라도 과거에 당신에게 베풀었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은 '따뜻함'에, 온도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시인 69인이 참여한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실천문학사 펴냄) 시집에도 온도에 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엄마, 여긴 추워요." (강은교)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 있다." (김선우) 세월호 비극과 관련된 이런 '온도'와 관련된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것이겠죠. 주장을 담은 명제를 통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입장은 이차적입니다. 우리가 그런 정치적 입장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추동력 즉, 공동체의 힘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그것이 바로 '온도'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그런 온도를 공동체가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사건 가운데 사건이었죠.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비극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 이전에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같은 온도를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져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죠. 이와 관련해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의미 있는 통찰을 앞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에서 들뢰즈가 회고하기도 합니다만, 그는 들뢰즈의 고등학교 철학 선생님이기도 했죠. 들뢰즈는 그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었지만, 아주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기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합니다.) "역사가와 철학자는 계급이나 민족의 객관적 정의(definition)를 찾는다. 계급은 총소득액이나 생산 라인 직위에 기반을 두는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들의 어느 것도 한 개인이 어떤 민족이나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계급, 계층, 세대 등을 정의하는 '객관적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이런 객관적 정의가 얼마나 무력한지 잘 알 수 있죠. 실제로 어떤 사건의 국면에서는 이런 객관적 정의는 사실상 전혀 무용하죠. 당장 메를로퐁티는 날카롭게 그 예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혁명에는 혁명적 계급과 합류하는 특권층들이 있고, 특권층에 기여하는 억압받는 층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과학적·객관적·규약적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정의되는 '계급'이나 '입장'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극적인 방식으로 알려줬죠. 한마디로 '온도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개의 알갱이가 아니라 그런 원초적 공동체에 속하며 또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프레시안 : 말씀을 듣고 보니 개인적 경험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작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한국에 없었어요. 물론 밖에서 마음 아파하며 이 믿지 못할 뉴스를 보기는 했죠.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주기를 맞는 상황에서 불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동료 기자들이 비극의 희생양이 된 아이들을 기억하는 기록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록을 읽을 때마다 마음의 벽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참사가 일어났던 시공간에 같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방금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온도의 공동체에 포함되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서동욱 : 방금 언급한 '콤플렉스'라는 단어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것의 정체는 그 자리에 마땅히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데 대한 느낌 아닐까요? 그런데 바로 그런 콤플렉스야말로 애초부터 그 온도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정확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콤플렉스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죠. 사실 지금 세월호를 추모하는 많은 시민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 말씀을 들으니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있어서는 안 될 비극을 계기로 그런 온도의 공동체를 새삼 체험한 것이 우리에게 어떤 삶의 의미로 각인이 될까요?
서동욱 : 사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지도 않습니다. 무엇인가 의미를 얻어내는 것조차 미안하고 괴로운 것이 세월호 참사이지요. 의미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건 죽은 자들과 맞바꾼 모종의 등가물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한없이 죄스럽게 느껴집니다. 죽은 이들은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하는데, 왜 삶을 소유한 우리는 삶에다가 덤으로 의미나 교훈 같은 것을 죽은 이들에게서 또 빼앗아 가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야할 자가 살아있기에 뭔가 깨달은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체험이나 학습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구체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입장 차이를 넘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주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을 세월호 비극을 경험하고 추모함으로써 알게 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경험은 앞으로 우리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을 집단으로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철학은 가능할까요?
서동욱 : 사유란 못 견딜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지요.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못 견디게 하는 부름 때문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얼마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저 거대한 고통 앞에서 철학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그 시간표를 짜는 얕은 머리를 어떻게 굴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다만 이런 말씀 정도는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세월호 앞에서 사유가 움직인다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때문에 움직인다고.
프레시안 :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당분간 계속해서 곱씹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