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단면도
한정원
페도라 모자를 반으로 자른다
머리 위의 모자, 머릿속의 모자
아버지가 지나온 미로 같은 개미의 통로
뇌주름 깊이 박힌 모래와 자갈길에서
항아리 가득 찬 담배 보루를 찾아낸다
모자의 한 평생은 쭈글쭈글 맵다
가장자리가 해진 중절모자의 챙을 뜯어낸다
머리를 끼워 맞췄던 공간
이력서처럼 붙어있는 하얀 라벨
아버지는 머리에 경첩을 달고 희망과 후회를
수천 번씩 드나들었다
울 백퍼센트의 기억은 푹신푹신, 복원력이 세다
검정, 빨강, 흰색 세 개의 모자를
베고니아 화분에서 떼어낸다
세르비아 스카다리아 골목의 카페에서 만난
시인들이 놓고 간 파나마 모자들
건망증은 모자를 놓고 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에스프레소의 단층 무늬
그 틈으로 기억이 새어나오는 오전 열 시
깃털 펜 위에 새들이 날아와 앉는다
미사일로 폐허가 된 시멘트 벌집에서
총성의 기억은 모자 깊숙이 똬리를 틀었다
코바늘로 짜인 비니 모자의 그물을 넓혀준다
주렁주렁 매달린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노트북에 저장한 양파와 카레와 버터의 온도를
모자는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모자는 주체이고 머리는 객체인 듯
모자는 언제나 머리 위에 있다
수직으로 잘린 벙거지 모자의 측면을 따라간다
모자는 이상한 동물이다
가난한 쌀 냄새를 풍기며
코리언 워는 수동태이고 현재 진행형이다, 라고 말한다
그 기억은 단면도처럼 숨길 수 없다
키가 큰 모자, 아담한 모자, 비뚤한 모자
용량이 큰 모자 속에서 머리는 배회한다
그리고 모자는 삼킨 것을 배설한다
시집『마마 아프리카』(2015),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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