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등고래
정채원
이따금 몸을 반 이상 물 밖으로 솟구친다
새끼를 낳으러
육천오백 킬로를 헤엄쳐온 어미 고래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
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
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
코고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신음소리가 섞여
긴 노래가 되고
예언처럼 멀고 먼 주름투성이 바다
뻔하고 모호한
젖은 몸뚱이는
이따금 물 밖으로 힘껏 솟구친다
다른 세상을 흘낏 엿보면서
그렇게 숨을 쉬면서
시작메모
가슴 답답한 날들, 뻔하고 뻔한 날들이 이어진다.
이따금 흘낏 다른 세상을 엿보는 일,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있으리라는) 걸 꿈결처럼 확인하는 일, 내겐 시를 쓰는 일이 그러하겠지.
그렇게 숨을 쉰다.
『시인수첩』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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