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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승자의 「자칭 詩」감상 / 김기택

Beyond 정채원 2016. 3. 23. 10:37

최승자의 「자칭 詩」감상 / 김기택

 

 

자칭 詩

 

   최승자(1952~ )

 

 

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시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시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시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도 잠가도, 새어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나오는 물처럼.

내 삶의 썩은 즙,

한잔 드시겠습니까?

(극소량의 시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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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칭 시’란 남이 시라고 보건 말건 쓴 사람이 스스로 시라고 주장하는 시를 일컫는다. 평균적인 수준에 한참 못 미쳐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눈을 가리면 자칭 시가 나오게 된다. 세상의 탁한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와 분탕질을 하면서 뒤섞인 후 끔찍한 화합물이 되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 할 때, 삶의 쓰고 괴로운 성분들이 몸을 한껏 괴롭히고 나서 몸 밖으로 흘러나오려고 할 때, 시인은 그것이 세심한 취급주의가 필요한 치명적인 독극물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리고 시의 이름으로 나오려는 이 정화되지 않은 말에 ‘자칭 시’라는 모멸적인 이름을 부여한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새벽 공기를 양심적인 목소리로 울리는 닭 모가지야 권력의 손아귀가 비틀겠지만, 현실 앞에서 무력하면서도 독성은 강한 시의 모가지는 시인이 스스로 비틀어야 한다. 시인은 위험한 언어가 나오는 제 몸을 비틀고 막고 저주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삶의 고통에 무감각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세상이 시라고 인정하든 말든, 이 지독한 말에는 기성의 시적 관습에 안주하는 시들을 반성하게 하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다. 시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과 광기의 힘이 있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자칭 시’가 넘치는 시대에 80년대의 거울로 오늘의 시, 나의 시를 다시 들여다본다.

 

   김기택 (시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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