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의 습관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리타 아침 먹어라 리타 배도 안고프니 리타! 리타!
새엄마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나는 도어록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가죠
대개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혼자서 밥을 먹는데
어떤 날, 내가 미처 모르는 무슨무슨 기념일이나 축하연 자리에
언니 형부 이모 나부랭이들이 식당을 꽉 메워버린 날,
맙소사! 그런 날은 마치
새엄마가 나를 똥구덩이에 처넣은 듯한 기분이 들곤 했죠
그 피할 수 없는 함정,
처음엔 입을 다물었어요
다음엔 용기를 내어 옆 사람의 스프를 떠먹었고
그다음엔 이모부에게 이렇게 말했죠
내 꺼 볼래?
나는 집에 있을 때면 늘 혼자 밥 먹는 것을 좋아했어요
나의 연기는 점점 무르익어갔고, 새엄마는 더 이상 나를 가족들과의 식사에 부르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와 가장 친한 폴이나 낸시를 만나 식사할 때도
나는 나도 모르게 연기를 하는 거예요
그간의 일들을 차근차근 얘기하고 싶은데
입안 가득 미끄덩거리는 음식과 범벅이 되어버린 말들
뱉어낼 수 없었죠, 도무지
포크는 쉬지 않고 음식을 찍어대고
더 이상 씹어야 할 내 몫의 음식이 남지 않았을 때
웨이터를 불렀어요, 식사 도중이었지만
낸시의 스테이크 접시를 당장 치우라고 비명을 질렀죠 그러고는 냅킨을 집어던지며
폴과 낸시를 향해 막무가내로 퍼붓는 거예요
날 굶겨 죽이고 싶겠지? 미치겠지? 너희 둘, 어림도 없어! 계획대로 될 것 같아? 무슨 계획? 꿈도 꾸지 마!!
아무도 웃지 않았죠
나는 단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싫어했을 뿐인데.
요즘은 침대 밑에서 먹어요
메어리는 안쓰럽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건네죠
리타, 이리 나와요 거긴 너무 어둡고…… 샐러드가 코로 들어가겠어요
그럼 난 이렇게 대꾸하죠
걱정 마세요 수간호사님, 이건 그저 연기일 뿐이니까요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수록-
리타 메어리 낸시 폴…… 당신은 너무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여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눈 코 입을 지워 버린 여자. 숨통이 막혀버린 여자. 눈앞이 캄캄한 여자. 등짐을 가득 싣고 주인을 기다리는 당나귀 같은 여자. 등에 실린 짐들은 마치 피부를 뚫고 나온 크고 작은 혹처럼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당신의 혹을 떼어줄 주인은 없다. 떠났다. 사라졌다.
유령처럼 당신은 침대에서 일어나 램프를 들고 어두운 복도를 지난다. 흑백의 사진들이 걸려 있는, 사진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죽은 자들을 지나 커튼 자락이 흔들리는 텅 빈 거실을 지나 어둠 속에서 포크와 나이프가 은빛으로 달그락거리는 어린 시절의 부엌을 서성이는 당신. 램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들.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먹고 마시는 그림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당신.
흙 속에서, 잠 속에서 당신은 성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등짐을 가득 실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성 앞에 당도했을 때, 당신의 미완성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지하실로, 지하실로 미끄러져갔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칼과 포크는 어디에 있는가. 램프의 불빛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당신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은 소리 없이 달그락거린다. 애타는 이 밤의 당신. 어두운 복도와 텅 빈 거실로부터, 식탁에 둘러앉은 검은 그림자들과 목소리들로부터, 당신은 성을 짓고 있었다. 당신이 미소 짓던 시간 속에서, 당신이 노래하던 시간 속에서. 당신이 춤추던 시간 속에서. 당신이 사랑의 집을 짓던 시간 속에서. 당신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동정을 아끼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당신이 당신의 주인이었던 시간 속에서.
당신의 이름은 리타 메어리 낸시 폴…… 당신은 누군가의 자궁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쏟아지던 기억으로부터, 젖을 물기 위해 네 발로 기어가던 기억으로부터, 두려움 속에서 두 발로 일어서던 기억으로부터,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지러지게 울던 기억으로부터, 기억 바깥의 모든 기억으로부터, 당신은 흙구덩이에 처박힌 한 마리의 당나귀처럼.
흙 속에서, 잠 속에서 당신은 계단을 내려선다. 한 계단, 한 계단…… 어떻게 미소 지었지, 어떻게 춤추었을까, 어떻게 노래했었지, 어떻게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어떻게 동정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나. 한 계단, 한 계단…… 지하실에서 지하실로. 지하실로부터 더 깊은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서며.
황병승
당신의 무너진 성 앞에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당나귀 한 마리. 당나귀의 이름은 리타 메어리 낸시 폴…… 당신은 너무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여자.
황병승 /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21’로 등단했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을 냈다.
가짜 세계를 관통하는 ‘부작용의 미학’
“어쩔 텐가 진짜 장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 사라진 나라 사라진 이름”.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양쪽 모두 미친 것들이니까”. 진짜는 없고 가짜들이 넘쳐나는 세계, 정상과 비정상 등의 거짓 이분법이 지배하며 온갖 부조리가 횡행하는 세계. 이 세계가 엄연히 ‘작용’하고 있다는 것만큼 놀라운 사실이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라는 점은 또 어떤가. 황병승의 낯설고 충격적인 시들은 현대문명이 구성하고 있는 “미친”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커밍아웃이자, 그 미학적인 부작용의 모험에 의해 탄생한다. 1인칭의 황홀한(?) 서정적 동일성을 팽개치고, 리타, 저팔계 여자, 힙합소년 j, 체셔고양이, 뒤통수, 똥 등 다른 이름, 다른 인칭, 다른 종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변형되는 시적 주체가 이 선언과 모험의 주인공이다.
가짜 세계의 폭력적인 작용에 태클을 거는 황병승의 ‘부작용의 미학’은 동화, 만화, 게임 등을 현란하게 동원하면서 하위문화의 스타일과 다국적성의 어법을 취한다. 그런데 텍스트에 대한 2차 텍스트로서 황병승의 시는 존재하지 않는 원본에 대한 번역본(황현산)이거나, 원본을 파격적으로 다시 씀으로써 원본도 복사본도 아닌 모호한 판본이 된다. 진짜 이름이 없기에 어떤 이름으로든 불릴 수 있으며, “진짜 장면이 사라진” 세계에서 “죽음도 삶도 아닌” 기이한 시간을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불안정한 존재들처럼 말이다.
실재와 허구, 현실과 텍스트 등의 경계를 허물면서 다시 새로운 허구의 세계를 빚는 황병승의 시는, 수학의 ‘허수’(虛數)에 비견될 수 있다. 존재하지 않지만, 실수(實數)의 현실에 개입해 필요한 작용을 하고 사라지는 허수를, 수학자이며 신학자인 라이프니츠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양서류와 같은 것이며, 성스러운 영혼의 놀랍도록 훌륭한 피난처”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황병승 시에 가득한 혼돈과 광기의 이미지들은, 존재와 비존재를 가로지르는 ‘성스러운 영혼’의 현대판 얼굴, 황병승의 어휘로는 ‘뒤통수’인 것은 아닐까. 실수를 온전케 하는 허수, 얼굴을 온전케 하는 뒤통수, 세계와 인간을 온전케 하는 시와 예술.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