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승진했다. 이곳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 생겼다. 재미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에너지원이다. 재미는 사람을 재빨리, 단시간에 변
화시킨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승진했으며,
더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승진과 비(非)승진 사이로 부
는 바람은 태풍 전야의 바람만큼이나 세차다. 이제 그 사이
에 있던 모든 것들은 뽑혀나가거나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
다. 재미를 잃은 것들은 모두 시들시들 먼지로 변할 것이다.
먼지는 내가 입 밖에 내지 못한 나의 비명들이다. 그는 이
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재미를 잃은 먼지는 비명들은 곧 누
군가의 침묵으로 변하고 누군가의 절망이 되어 사라질 것이
다. 떠나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진다. 끝도 없이 반복되
며 이어지는 저 아리따운 장례 행렬들처럼!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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