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김상미 시집

Beyond 정채원 2017. 5. 12. 14:07

오렌지


김상미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승진했다. 이곳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 생겼다. 재미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에너지원이다.  재미는 사람을 재빨리, 단시간에 변

화시킨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그는 승진했으며,

더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승진과 비(非)승진 사이로 부

는 바람은 태풍 전야의 바람만큼이나 세차다. 이제 그 사이

에 있던 모든 것들은 뽑혀나가거나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

다. 재미를 잃은 것들은 모두 시들시들 먼지로 변할 것이다.

먼지는 내가 입 밖에 내지 못한 나의 비명들이다. 그는 이

제 이곳에 오지 않는다. 재미를 잃은 먼지는 비명들은 곧 누

군가의 침묵으로 변하고 누군가의 절망이 되어 사라질 것이

다. 떠나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진다. 끝도 없이 반복되

며 이어지는 저 아리따운 장례 행렬들처럼!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