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앨범 7
김상미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
그 시를 읽으면 모두가 죽어버리는 시를 쓰고 싶다
아니다, 모두가 다 읽는 시를 쓰고 싶다
그 시를 읽으면 죽어가던 것들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시를 쓰고
싶다
꿈같은 일이다
아무리 좋은 시에 앙심을 품고, 주먹을 쥐고, 간절히 갈구하며
훔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굴려도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그런 시를 쓰지 못하고
이 시도 저 시도 다 쓰레기 같아
활활 타오르는 시어들의 모닥불 속에 모두 던져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둘러줄 게 시밖에 없어
뜬구름 잡듯 또다시 펜을 집어 든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큰소리치며 인습을 뛰어넘듯 용감하게
있는 대로 생식기를 발기시키면서
허기지고 굶주린 시 속으로
미치고 미친 시 속으로
미치고 미쳐 꺼꾸러질 때까지
꺼꾸러져 희디흰 뼛가루가 되어
폭풍 속의 꽃가루처럼
훨훨 한 편의 시로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현대시학』2018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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