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원의 「홀로그램」 감상 / 이경수
홀로그램
정채원
달려와 헐떡이며 나를 포옹할 때
너는 실재처럼 느껴져
아니, 돌아서 입술을 씰룩이며 욕을 내뱉을 때
더 실재처럼 보여
돌을 던지면 잠잠히 흘러내리고
꽃다발을 안기면 시궁창 냄새를 풍길 때가
너는 가장 리얼하지
가장 사랑스럽지
자꾸 다정하게 웃지 마
사탕바구니를 든 할로윈의 유령처럼,
사랑에 빠지기 쉬운 이 지루한 환절기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다 그치는 빗줄기에선
맥주 냄새가 난다고,
너 또 취했구나
거울 속에 도취했구나
취하지 않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사람처럼
아프지 않곤 잠들 수 없는 또 하루가 저물고
꿈길에선 오늘도 뜬눈이 뻑뻑하겠구나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삿짐을 정리할 때
망치로 못을 박으며 제 손가락을 내려칠 때
액자 속에 액자를 걸고
깨진 거울 속에서도 코를 골며 잠들 때
너는 잠시 영롱하게 펼쳐지지
머지않아 다시 접힐지라도
『애지』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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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hologram)은 두 개의 레이저광이 서로 만나 일으키는 빛의 간섭효과를 이용해 3차원 입체 영상을 기록한 결과물을 가리킨다. 실재와 가상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홀로그램을 통해 정채원의 시는 실재와 가상의 구별이 어려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우리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체온이 느껴지고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더 이상 실재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어려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정제된 말이 아닌 “입술을 씰룩이며 욕을 내뱉을 때” 더 실재처럼 보이고 시궁창 냄새라도 풍겨야 리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실재를 실감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세계에서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취하지 않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나 “아프지 않곤 잠들 수 없는 또 하루가” 저무는 것처럼 힘겨울지도 모르겠다.
이경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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