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정채원의 홀로그램 감상/이경수

Beyond 정채원 2018. 11. 5. 07:01

정채원의 홀로그램감상 / 이경수 

 

홀로그램

 

정채원

 

 

달려와 헐떡이며 나를 포옹할 때

너는 실재처럼 느껴져

아니, 돌아서 입술을 씰룩이며 욕을 내뱉을 때

더 실재처럼 보여

 

돌을 던지면 잠잠히 흘러내리고

꽃다발을 안기면 시궁창 냄새를 풍길 때가

너는 가장 리얼하지

가장 사랑스럽지

 

자꾸 다정하게 웃지 마

사탕바구니를 든 할로윈의 유령처럼,

사랑에 빠지기 쉬운 이 지루한 환절기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다 그치는 빗줄기에선

맥주 냄새가 난다고,

너 또 취했구나

거울 속에 도취했구나

 

취하지 않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사람처럼

아프지 않곤 잠들 수 없는 또 하루가 저물고

꿈길에선 오늘도 뜬눈이 뻑뻑하겠구나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삿짐을 정리할 때

망치로 못을 박으며 제 손가락을 내려칠 때

액자 속에 액자를 걸고

깨진 거울 속에서도 코를 골며 잠들 때

 

너는 잠시 영롱하게 펼쳐지지

머지않아 다시 접힐지라도

 

 


『애지』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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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hologram)은 두 개의 레이저광이 서로 만나 일으키는 빛의 간섭효과를 이용해 3차원 입체 영상을 기록한 결과물을 가리킨다. 실재와 가상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홀로그램을 통해 정채원의 시는 실재와 가상의 구별이 어려워진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우리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체온이 느껴지고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더 이상 실재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어려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정제된 말이 아닌 입술을 씰룩이며 욕을 내뱉을 때더 실재처럼 보이고 시궁창 냄새라도 풍겨야 리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실재를 실감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세계에서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취하지 않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것이나 아프지 않곤 잠들 수 없는 또 하루가저무는 것처럼 힘겨울지도 모르겠다.  

 

 이경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