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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최문자

Beyond 정채원 2019. 5. 26. 16:24


그림자


최문자



나는 자꾸 들켰다

나쁜 폐와 슬픈 아가미를


숨긴다는 건 뭔가요

스푼으로 나를 사라지도록 젓는 것

나는 풀어지지만 나는 줄어들지 않아


내가 없는 곳은 어디인가


그들은 그림자로 나를 보고 있다

그림자는 더 죄인인 것처럼 크고 검다


내 뒤에서 자꾸 넘어지고 자꾸 미끄러지는 것

그것이 나일까? 죄일까?


물끄러미 그림자의 긴 목을 바라본다


때때로 잘린 단면은

내가 부서진 곳이다



진화


숯을 품고 있었다

불은 나의 형식

머리카락이 길고

타는 곳에서 더 타는 곳으로

새처럼 날아다녔다


어제

가장 무서운 연기를 마시고

오늘 나만 남았다


동쪽에서 자라는 나의 밀밭이 있다

멀리서 보면 푸른 비극

그 사잇길을 걸어서

새 노트를 사러 갔다

불의 일기를 쓰고

지우지 않고

만지고 넘기고 오래 읽었다


자꾸 물을 깨닫는 오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로 떠돌자는 것


가장 슬픈 색깔은

타지 못하는 색깔


가슴에 물만 남아서

숯은 이제 미지근한 슬픈 액체



민음의시 255 최문자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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