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최문자
나는 자꾸 들켰다
나쁜 폐와 슬픈 아가미를
숨긴다는 건 뭔가요
스푼으로 나를 사라지도록 젓는 것
나는 풀어지지만 나는 줄어들지 않아
내가 없는 곳은 어디인가
그들은 그림자로 나를 보고 있다
그림자는 더 죄인인 것처럼 크고 검다
내 뒤에서 자꾸 넘어지고 자꾸 미끄러지는 것
그것이 나일까? 죄일까?
물끄러미 그림자의 긴 목을 바라본다
때때로 잘린 단면은
내가 부서진 곳이다
진화
숯을 품고 있었다
불은 나의 형식
머리카락이 길고
타는 곳에서 더 타는 곳으로
새처럼 날아다녔다
어제
가장 무서운 연기를 마시고
오늘 나만 남았다
동쪽에서 자라는 나의 밀밭이 있다
멀리서 보면 푸른 비극
그 사잇길을 걸어서
새 노트를 사러 갔다
불의 일기를 쓰고
지우지 않고
만지고 넘기고 오래 읽었다
자꾸 물을 깨닫는 오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로 떠돌자는 것
가장 슬픈 색깔은
타지 못하는 색깔
가슴에 물만 남아서
숯은 이제 미지근한 슬픈 액체
민음의시 255 최문자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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