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남진우
비를 뚫고
그가 왔다.
자욱한 비내음을 몰고 그는 거실 가득 빗소리를 풀어놓
았다. 선반 위 유리병들이 덜그럭대고 물에 젖은 편지가,
진단서와 영수증이 둥둥 떠내려가고 벽을 따라 도마뱀이
기어내려왔다.
그의 등 뒤로 그가 데리고 온 빗방울마다 뚫린 구멍이
번득이고 도마뱀이 기어간 자국을 따라 비린내를 풍기며
이끼가 번져갔다. 비를 뚫는, 빗방울마다 구멍을 내는 그
의 번득이는 눈과 입이 허공을 들이마시는 동안 유리창은
튀어오르는 빗물을 받아내느라 어두웠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집 곳곳에 물웅덩이가 패였
다. 형광등의 불이 나가고 컴퓨터 화면이 꺼지고 전화기가
빗소리로 가득 차오르기까지 비가 전해주는 말들이 집에
서 집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불온하게 퍼져나갔다. 비에 갇
힌 집마다 사방 벽과 마루가 비밀스러운 속삭임으로 끓어
올랐다가 날아다니는 물고기들로 어지러웠다가 순식간에
텅비어버렸다.
비가 풀어놓는 소식이 시들해질 무렵
비에 뚫린 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를 뚫고 그는 다시 떠났다.
도마뱀도 이끼도 다 사라진, 집이 있던 자리, 비어 있는
허공에
보이지 않는 말들이 들끓고 있었다.
《현대시학》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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