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비어/남진우

Beyond 정채원 2021. 3. 8. 23:10

   비어

 

   남진우

 

 

   비를 뚫고

   그가 왔다.

 

   자욱한 비내음을 몰고 그는 거실 가득 빗소리를 풀어놓

았다. 선반 위 유리병들이 덜그럭대고 물에 젖은 편지가,

진단서와 영수증이 둥둥 떠내려가고 벽을 따라 도마뱀이

기어내려왔다.

 

   그의 등 뒤로 그가 데리고 온 빗방울마다 뚫린 구멍이

번득이고 도마뱀이 기어간 자국을 따라 비린내를 풍기며

이끼가 번져갔다. 비를 뚫는, 빗방울마다 구멍을 내는 그

의 번득이는 눈과 입이 허공을 들이마시는 동안 유리창은

튀어오르는 빗물을 받아내느라 어두웠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집 곳곳에 물웅덩이가 패였

다. 형광등의 불이 나가고 컴퓨터 화면이 꺼지고 전화기가

빗소리로 가득 차오르기까지 비가 전해주는 말들이 집에

서 집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불온하게 퍼져나갔다. 비에 갇

힌 집마다 사방 벽과 마루가 비밀스러운 속삭임으로 끓어

올랐다가 날아다니는 물고기들로 어지러웠다가 순식간에

텅비어버렸다.

 

   비가 풀어놓는 소식이 시들해질 무렵

   비에 뚫린 집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를 뚫고 그는 다시 떠났다.

 

   도마뱀도 이끼도 다 사라진, 집이 있던 자리, 비어 있는

허공에

   보이지 않는 말들이 들끓고 있었다.

 

 

 

   《현대시학》 2021년 1-2월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식/이덕규  (0) 2021.03.23
날아가는 돌/김관용  (0) 2021.03.16
고전적 잉여/김하늘  (0) 2021.02.27
마른 내(乾川)/강영은  (0) 2021.02.18
헛것을 따라다니다 외 2편/김형영  (0) 20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