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가는 길
정우신
약 먹고 물 먹고
거울을 보며 우린 더 살아야 하지 웃고 울어봐
날벌레는 아니지만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겠지 아이가 무심코 엎지른 컵에 붙어 허둥거리겠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절차 없는 긴 장례식이었지 우리가 걷는다는 것과 먹어야 한다는 것 계속 자야 한다는 것
동정과 비난과 환희 속에서 숲과 하천과 산책 길 그리고 울음 속에서
죽음이 나를 이미 다 파먹어서 죽을 수가 없네
약 먹고 물 먹고
아직 첼로는 켜지 말고 자화상을 그려봐 자유로워지는 순간, 열리는 시간에서
물은 자신의 맛을 알고 싶어 할까
물의 속성
불을 마시려는
나의 사랑에게
아무 할 말이 없어서 끄적여보는 밤
교육시켜주세요 더욱 커다란 용기와 확신을 주세요 기도하는 밤 외쳐보는 밤
한 계절 창가에서
지내다 보면
잃어버린 귀 한쪽을 찾아 떠도는 바람이 온다
물 먹고 약 먹고
우린 더 살아야 하지 병원비와 공과금이 밀리는 방식으로 인생을 늘려야 하지 아이의 미래가 나의 과거가 되지 않도록 울고 웃어봐
다 끝마치고 싶은데 어떤 노래를 틀어야 할까
눈송이를 간직하고 싶어서 나무를 들였지
길을 걷다가 먹고 자다가 언뜻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와 움푹 팬 상처가 난 자리로 내려앉는 눈보라
양쪽을 번갈아 밟고 가야지
현대문학 PIN시집 『홍콩 정원』에서
'책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김인숙 시집 (0) | 2021.03.27 |
|---|---|
|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김점용 시집 (0) | 2021.03.25 |
| 안녕은 혼자일 때 녹는다/최연수 시집 (0) | 2021.03.08 |
|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홍지호 (0) | 2021.02.21 |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임솔아 (0) | 2021.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