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홍콩 정원/정우신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3. 20. 14:16

   익산 가는 길

   정우신

 

 

   약 먹고 물 먹고

 

   거울을 보며 우린 더 살아야 하지 웃고 울어봐

 

   날벌레는 아니지만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겠지 아이가 무심코 엎지른 컵에 붙어 허둥거리겠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절차 없는 긴 장례식이었지 우리가 걷는다는 것과 먹어야 한다는 것 계속 자야 한다는 것

 

   동정과 비난과 환희 속에서 숲과 하천과 산책 길 그리고 울음 속에서

 

   죽음이 나를 이미 다 파먹어서 죽을 수가 없네

 

   약 먹고 물 먹고

 

   아직 첼로는 켜지 말고 자화상을 그려봐 자유로워지는 순간, 열리는 시간에서

 

   물은 자신의 맛을 알고 싶어 할까

 

   물의 속성

   불을 마시려는

 

   나의 사랑에게

 

   아무 할 말이 없어서 끄적여보는 밤

 

   교육시켜주세요 더욱 커다란 용기와 확신을 주세요 기도하는 밤 외쳐보는 밤

 

   한 계절 창가에서

   지내다 보면

   잃어버린 귀 한쪽을 찾아 떠도는 바람이 온다

 

   물 먹고 약 먹고

 

   우린 더 살아야 하지 병원비와 공과금이 밀리는 방식으로 인생을 늘려야 하지 아이의 미래가 나의 과거가 되지 않도록 울고 웃어봐

 

   다 끝마치고 싶은데 어떤 노래를 틀어야 할까

 

   눈송이를 간직하고 싶어서 나무를 들였지

 

   길을 걷다가 먹고 자다가 언뜻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와 움푹 팬 상처가 난 자리로 내려앉는 눈보라

 

   양쪽을 번갈아 밟고 가야지

 

 

현대문학 PIN시집 『홍콩 정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