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복수는 나의 것
이현승
복수나 복수심을 모티프로 하는 시를 쓰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복수는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것은 아니고 형편껏 눈에 이, 이에 눈 같은 것도 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나은 방향의 복수이다. 복수가 되갚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언가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극기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복수 중의 복수이다. 반드시 갚는다, 는 나의 신조 중의 신조이다. 오죽했으면 나는 복수심 때문에 볼테르의 책을 몽땅 사고 작품을 찾아 읽을 정도였다. 볼테르는 복수심이 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런 문장 하나가 볼테르에게 흥미를 가지게 했다. 볼테르를 흠모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이없겠지만, 나는 볼테르에게서 나와 거의 일치하는 형질의 복수심을 봤다. 나는 만상을 이해할 때 그 반대편의 것을 은연중에 맞춰 보는 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볼테르를 관용이라는 키워드로 이해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관용은 최고의 복수이다.
복수 하면 박찬욱 감독을 명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은 복수 3부작이 떠오른다. 그의 복수 3연작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물론 그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은 <복수는 나의 것>(2002)이고, 거기 동진(송강호)이 류(신하균)의 아킬레스건을 자를 때의 대사를 좋아한다. “너도 내 마음 알지?”였나?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눈물을 찍어냈는지 모르겠다. 죽이려는 사람과 죽어주려는 사람의 합의가 이루어진 이 표정과 대사는 정말이지 압권이다. 죄없이 죽은 딸의 복수 외에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빠가 누이의 수술을 위해 위해서 자신을 해고한 회사 사장의 딸 유선을 유괴하고(‘착한 유괴’) 사실은 딸아이와 잘 지냈지만 개울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익사하게 된 죄책감으로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장의 마음을 기꺼이 이해할 때, 이 복수는 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균열된다. 복수가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린 아빠가 죽이려고 하는 사람 또한 알고 보면 억울한 사람이다. 세상에 대고 해야 할 복수의 몫이 있는 사람이다. 신부전증을 앓는 누이의 수술을 위해서는 일해야 하지만 해고되고, 혈액형이 달라서 신장을 줄 수도 없고, 누이에게 맞는 신장을 찾아 전재산과 자신의 장기를 주지만 사기당하고 수술비와 자신의 신장을 도둑맞은 류(신하균) 역시도 복수가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 사회적 분노의 수준으로 고양된 우리사회의 감정선과 임계점을 나는 거의 매일 목격하게 되는 것 같다. 영화는 2002년 작이지만, 2021년의 지금 사회도 여전하다. 해소되기 어려운 수준으로 축적된 분노와 혐오의 감정들이 매일 넘쳐나는 미디어를 보고 있자면 정치나 사법정의의 실종을 개탄하기에도 때늦은 듯하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어법 자체도 혐오를 조장하는 어법이다) 혐오와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분노와 무기력 사이를 부단히 오가다가 탄력을 잃는다.
아마도 복수심을 모티프로 하는 시를 쓰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극기복례가 최고의 복수니까 어쩌면 이미 복수를 주제로 하는 시는 써온 것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자연주의 같은 시선을 통해서 얼마간 이런 복수의 마음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가령 나는 토마스 하디의 비정한 단편들을 좋아한다. 「어리석은 주드」나 「아내를 위하여」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소설의 말미에 반쯤 미쳐버린 사람들을 공들여 그리고 있는 토마스 하디의 태도를 생각하면 얼마간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의 그런 태도에는 눈앞의 욕망을 쫓을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이지만 인간은 그 선택을 통해서 또한 상을 받거나 처벌받을 뿐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쁜 짓으로 인해서 벌을 받기 전에, ‘나쁜 짓’을 하게 되고, 그래서 나쁜 인간이 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처벌이라는 발상을 나도 하는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어떤 보상으로 바꿔질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일 그 자체로서 의미와 보상이 되도록 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시를 쓴 지 꽤 오래 되었지만, 사람이 많이 해 본다고 늘 느는 것은 아닌 영역도 있는 듯하다. 시를 쓸 때마다 어떤 대치 상태 같은 순간이 오고, 무용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막막하고 답답-아득하여 또 손가락 타령이 나오려고 한다. 손가락 타령이란 글을 쓸 때의 막막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 비유인데, 망치로 손가락을 하나 내려찍어서 막혔던 한 구절을 얻을 수 있다면 열 손가락을 다 찍어버리고 싶은 게 글 쓰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손가락을 망치로 내려찍지 않은 이유는 내가 쓴 대부분의 시들이 10행이 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막막함이야말로 진짜 삶의 밀도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러다 금세 한 마디의 글줄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도시 마감이 안 되는 원고를 붙잡고서 밤을 새우는 날이면 희부윰하니 밝아오는 창을 보며 저 너머 어딘가에서 존경하는 황현산 선생님께서도 밤을 선생 삼아 원고를 쓰고 계시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큰 위로가 되었다. 저기 어디에 누군가가 나와 함께 마른 침을 삼키면서 이 메마른 시간을 건너가는 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글 쓰기의 집중된 고독감이 얼마간 달래졌다. 다음의 시를 보면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李聖善)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의 첫부분을 빌리다.
-김사인,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전문
무슨 주석이 필요할까. 시의 화자들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으로는 용호상박이다. 좋은 시를 옮겨 적는 것만으로 한 벌 지은 셈 해달라는 부탁 속에서 간접화된 시 쓰기의 어려움도 공감이 가지만, 옮겨 적은 시 「다리」의 전언인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를 비틀어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이라고 쓴 재기는 더 한층 흐뭇하다. 그런데, 다시 인용된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의 두 연까지 합하여 이 시는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시가 되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짝을 이루고 있다. 다리의 외로움을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은 작고 약한 것들에게 마음을 개방하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과 짝을 이룬다. 시의 인용이 전혀 새로운 한편의 시가 되는 이 시를 보고 있자니, 무얼 좋아한다면 이 정도의 깊이는 되어야 하는 구나 싶다.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 좋아하는 마음을 전염시키고 만다. 또한 좋아하는 마음이 바로 어떤 눈앞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외로움 많고 속 깊고 다정한 두 분의 시인, 세 편의 시가 함께 어우러진다.
시 쓰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는 생각은 시에 걸리지 않고 쓰겠다는 ‘나’에 걸린다. 이러니 시가 점점 어려울 밖에. 시가 안 될 때는 나빼고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니다. 마중물은 내가 부을지 몰라도 어떤 개방의 순간이 오고, 그때 지금까지는 분명코 나의 것이 아니었던 어떤 정념과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사는 일이 번잡하고 바쁘면 특별히 더 시 쓰는 일이 어려운데, 사실 바쁜 세상이 그만큼 시를 외롭게 해 온 셈이지. 내것도 아닌 분노에 너무 매달려 있지 말고, 이 순정한 부끄러움을 마중물 삼아서 외로운 시에게 작은 화해의 편지를 보내 봐야겠다. 나도 최근에 꼭 쓰고 싶은 시가 있었는데, 정말 감쪽같이 누가 그걸 시로 쓴 경험이 있었다. 그는 내 것을 훔쳐가지 않았지만, 나는 내 것을 도둑맞은 이 사태를 나는 또 어떻게 갚아줄 것인가.(내가 도둑맞은 시는 장만호의 「쉰」이었다.) 복수는 나의 것.
《계간 파란》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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