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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멜랑콜리의 감응과 아우라의 기율/오형엽

Beyond 정채원 2021. 4. 6. 20:33

멜랑콜리의 감응과 아우라의 기율

ㅡ황인찬 시의 미학적 특이성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을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ㅡ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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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로 황인찬 시의 화면이나 이야기에는 인물, 사건, 배경 등의 요소가 다양하게 등장하지만, 이 시에서는 화자의 시선이 "방"에 놓여 있는 "백자"에 집약적으로 수렴되는 구도가 제시된다. "백자"는 화자가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 혹은 신비로운 신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 실체적 의미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시적 아우라가 더 중요하다. 이 시에서 "방"과 "백자"로 수렴되는 시적 아우라는 황인찬 시의 고유한 미학적 특이성으로서 형상화 방법을 농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황인찬 시의 미학적 특이성으로서 시적 형상화 방법은 조도, 음도, 공기 밀도의 조율, 공간과 대상에 아우라 부여, 공백과 침묵의 공간, 주체와 대상의 엇갈림, 시간의 경과, 기억의 보존, 실체로서 대상과 주체의 사라집 등의 요소들을 긴밀히 결합하면서 시적 장치를 구성하고, 이 시적 장치는 담담한 멜랑콜리라는 감응으로 수렴되면서 관계의 역학을 성립시키는 구조화 원리를 형성한다.

 

 

(…)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과 「거주자」에서 시적 공간이나 대상에 부여하는 아우라의 기율로서 조도, 음도, 공기의 밀도를 조율하여 정밀한 정신으로 집약하는 방법은 「돌이 되어」에서 "화이트 아웃" 혹은 "백시"의 시선으로 변주되어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면서 엇갈리는 연상의 흐름을 통해 양극적 행위나 비전을 번갈아 제시함으로써 양식을 벗어나는 반양식을 만들고 행위나 비전이 파생시키는 의미를 무효화시킨다. 이처럼 변주된 아우라의 기율을 통해 황인찬의 시는 삶과 죽음,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횡단하면서 기억의 장면들을 인화하고 존재의 전환을 묘사한다. 황인찬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이성으로서 지금까지 해명한 시적 형상화 방식과 구조화 원리는 2020년대에 진입하면서 새롭게 전개되는 한국 현대시의 행로들 중에서 중요한 하나의 길을 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오형엽(문학평론가), 『시인수첩』202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