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을 지나다
최정례
왜 여기를 지나는지
왜 저 붉은 알약들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몇년 몇월 몇일 몇 시 몇 분이었는지
한 웅큼 알약을 털어 넣고
먼 싸이렌 소리를 듣던 게
예리한 칼 같은 것이 살을 베이면
베이는 순간은 통증을 모른다
늦게 불이 켜진 약국을 지난다
약병 속에는 이상한 이름의 성분들
그들이 지녔던 깨알 같던 희망도
죽어 정리되어 있으리라
무엇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는 것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병들은 참 나란히도 정리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쓰라림과 욱신거림은 온다
약국의 셔터가 내려질 시간이다
아침달 시집 12 《햇빛 속에 호랑이》, 세계사 시집 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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