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약국을 지나다/최정례

Beyond 정채원 2021. 4. 8. 16:03


약국을 지나다

최정례

 

 

왜 여기를 지나는지
왜 저 붉은 알약들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몇년 몇월 몇일 몇 시 몇 분이었는지
한 웅큼 알약을 털어 넣고
먼 싸이렌 소리를 듣던 게

 

예리한 칼 같은 것이 살을 베이면
베이는 순간은 통증을 모른다

 

늦게 불이 켜진 약국을 지난다
약병 속에는 이상한 이름의 성분들
그들이 지녔던 깨알 같던 희망도
죽어 정리되어 있으리라

 

무엇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는 것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병들은 참 나란히도 정리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쓰라림과 욱신거림은 온다

 

약국의 셔터가 내려질 시간이다

 

 

 

아침달 시집 12 《햇빛 속에 호랑이》, 세계사 시집 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