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정물靜物
기혁
끊임없이 배반하며 살아온 삶이다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머물던 자리의 투명은
언제나 자국이라 부른다
죽음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얼굴은
죽음의 자국
살아있는 물과 뒤섞여
가짜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목마른 벌레의 기분으로
물병에 꽂힌 조화造花를 바라볼 때
매일 아침 탁자를 순례하는 고독이
둥그런 자국을 남긴다
그것은
붓으로 그린 것보다 정교한 진실의 흔적
명명의 순간부터 나에겐
원죄를 벗어날 수 없는 강박이 있다
천사는 늘 과장법이었고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궤적도
언어의 순도를 지키지 못했다
수면에 비친 오필리아의 얼굴마저
덧칠한 불순물로 일렁거릴 무렵
나는 가면이 되어 울고 있었다
가면의 움직임을 따라
비련의 자국이 되어 있었다
펄펄 끓어도 사라지지 않는 도시의 무의식이
내 정신의 양수가 되고
타인을 본다는 믿음마저
하수구 속 시커먼 요람으로 배출되는 동안
순수함은 증발하는 위선에 시간을 더한 것
오래된 찬양을 위해서 자주 신의 이름을 불렀다
젖은 종이가 마르면 아직도 사막이 지글거린다
세속적 욕망을 채운 물자루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경멸했던 낙타는
경전을 운반하며 일생을 보냈다고
낙타의 등에서 함께 밤이슬을 맞던 순례자가
물 얼룩 때문에 목숨을 끊을 때
한 폭의 수채화가 진실을 목마르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이 담겼던 그릇에서
투명의 반대편은 잊기로 하자
촛불이 꺼질 때까지
물감이 풀린 성수聖水는 오직 자신을 용서하는 중이다
《시와 편견》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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