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적
천양희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은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걸음걸이가 불편해도 불행하지는 않아
먼 땅을 밟고 나는 걸어가는 사람
하늘을 나는 것도 물 위를 걷는 것도
아닌데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인데
길은 얼마나 많은 자국을
감추고 있어서 미로인가
발은 또 얼마나 많은 길을
숨기고 있어서 발길인가
길 따라 가다보면
서울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어
나는 긴 길의 기억을 가지려고
가끔 쉬어도 갈 것이다
천양희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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