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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다행한/천양희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5. 5. 11:36

일상의 기적

천양희

 

 

갈 길은 먼데

무릎에다 인공관절은 넣고

지팡이는 외로 짚고 터벅터벅

서울 사막을 걸어갈 때

울지 않아도 눈이 젖어 있는 낙타처럼

내 발끝도 젖는다

 

갈 데까지 걸어봐야지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가봐야지

요즈음의 내 기적은

이 길에서 저 사잇길로 나아가는 것

 

딱 한걸음만 옮기고 싶은

고비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때

꿇었던 뒤에도 서서 걸었던 자국

 

걸음걸이가 불편해도 불행하지는 않아

먼 땅을 밟고 나는 걸어가는 사람

 

하늘을 나는 것도 물 위를 걷는 것도

아닌데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나에게는 기적인데

 

길은 얼마나 많은 자국을

감추고 있어서 미로인가

발은 또 얼마나 많은 길을

숨기고 있어서 발길인가

 

길 따라 가다보면

서울 사막에도 오아시스는 있어

나는 긴 길의 기억을 가지려고

가끔 쉬어도 갈 것이다

 

 

천양희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