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얼어 죽은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꽃집을 지나 집으로 가던 길이 사라졌다
국화꽃을 든 사람이 걸어와 아는 척했다
오래 기다렸다고 통성명이나 하자고
나는 어제 낮부터 잤는데 계속 잤는데
TV를 끄지 않고 온 생각이 났다
동물의 왕국 화면은 바뀌지 않고
사자와 늑대 얼룩말 하이에나가
밤의 초원을 어슬렁거렸다 초록색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고 아름다웠다
"누구 없어요" 소리쳤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밤일까 낮일까
푸르스름한 하늘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안개에 잠긴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누구냐고
나는 오래전부터 여기 살았다고 했는데
누군가 당신은 사흘 전에 죽었다고 했다
염쟁이가 와서 내 몸의 구멍이란 구멍을 다 막고 있었다
팔다리를 장작처럼 펴 온몸을 묶었다
"나를 아세요"
"이 일이 삼십 년째예요"
누군가 내 위에 꽃을 던졌다
검은 꽃이었다
열두 시가 조금 넘었다
회전목마
노란 말 앞에 하얀 말 앞에 파란 말 앞에
동물원 안에 여름 안에 북극곰 안에
철망 울타리 안에 아이들
아이스크림 고깔 모양 아이스크림 잠깐 맡겨 놓은 아이스크림
한 바퀴 두 바퀴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
천천히 핥아먹는 아이스크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홉 바퀴 열 바퀴 사라지는 아이스크림
들고 있던 언니는 어디로 갔나
흘러내린 자국은 어디로 갔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손은 어디로 갔나
약속은 녹아내리고 약속은 흔적이 없고
약속은 하얀색이고 약속은 바닐라 맛이고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처음부터 없었던 맛이고
서서 잠자는 말 하얀 말
나를 태우고 달리던 말 검은 말
깜빡깜빡 졸면서 달리는 말 늙은 말
붉은 지붕이 사라진다
자개장롱 분꽃 마당이 사라진다
결혼을 한 언니는 꼭 닮은 아이를 낳고
엄마는 어느 생의 요양원으로 가고
그러면 여름은 겨울이 되고
다시 눈꽃나무 가지마다 아이스크림이 달리고
최동은 시집 《한 사흘은 수천 년이고》, 파란시선 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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