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음이 길어질 때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밎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했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앵두나무 상영관
이 도시에 봄이 없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몇 분 간격으로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 터져 나온다
한쪽 눈을 감는 사이
바닥으로 누운 흰 사다리를 건넌다
소나기 그친 사이를 아이가 손을 들고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짚고 넘어간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순식간에 달려간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에 물리듯
빨강을 물고 앵두나무는 발설하지 않은 소문까지 뻗는다
앵두가 지면
초록 이파리가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에 매달릴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신호등이 봄을 켠다
짧은 치마를 입은 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맨 처음의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진혜진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 상상인 시선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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