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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정혜영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8. 26. 15:40

 

 

 

 

   재가 있는 풍경

 

    그녀가 땅에 엎어질 듯 치마폭을 벌려 재가 된 남편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거두고 있다

아테네에 평화를 가져왔던 포키온은 정작 무덤조차 금지된 채 나라 밖에 버려졌다 포키온

의 아내, 한 줌 재가 된 남편을 물에 타서 마신다 자신의 몸을 무덤 삼아 재를 마신다 성聖

수요일, 재에서 왔으니 재로 돌아가리라 그대의 무덤, 나의 육신

 

 

   단 한 그루의 숲

 

    반얀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 땅에 닿으면서 번식한

다 각기 홀로 서 있는 줄 알았는데 뿌리가 하나다

 

   꿈속에서 엄마가 혼자 강을 건너고 있었다 놀라서 울면서 깨어났다 인치사 발다르노

로삐아노는 새벽 3시, 꼬레아는 오전 11시, 울음 끝이 통증으로 다가왔다 전화 속의 엄

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는 울지 않는 엄마 아들의 주검 앞에서도 밥 먹으라던 엄마 그녀

가 날 불렀던가

 

    멀리서 숲을 보았는데 가까이 보니 한 그루의 나무다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1

– 낡은 계단 뒤에 처박힌 마른 부케를 누구에게 받았더라

  그걸 왜 받았지

  백화점 쇼원도에 가만히 내려놓고 왔는데 왜 여기 있지

 

 

    나는 오늘 뿔 달린 순록, 모자 속에 감춘 뿔이 자꾸만 삐져나온다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발길질을 한다

    창문 밖에는 흰눈이 오고

    지구가 시작된 어느 때로 슬라이드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고

    유전자 속에서 인류가 인류를 부르는 소리

 

    돌아와, 돌아갈까

 

    순록의 뿔에서는 막혔던 방언이 쏟아지고 그 방언이 폭설이 되면 눈 속에 갇힌 하얀 말들이 너의 청혼이라고 생각할래

 

    쉿, 이건 내 생에 없던 계획

    순록이 지친 날도 백야는 계속되고

 

    아침엔 자고 밤이면 일어나서

    여름 내내 북구의 폭설을 배달하지

 

    모자를 벗은 순록이 썰매를 끌고 내 집 앞을 지나가는 동안

    공중에서 사라지는 고양이는 생각이 골똘하고 눈 위의 발자국은 담장에 박힌 파란 유리조각을 생각해

 

    너 없는 연대기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지, 땅이 꺼지면 남극에 닿을까, 북구에도 비가 올까, 비가 오면 그날처럼 네가 내 앞을 지나갈까

 

    나 하나도 모르겠고 너는 더 모를 것인데, 그럼 안녕!

 

    빨간 벽돌집을 지었다 헐었다 수선화 알뿌리를 갈무리한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니까 자꾸만 지나갈 시간이니까 

 

    박공지붕 아래 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목이 긴 와인잔을 기울이며

    다시 시작하려고

    한 손에는 포크를 한 손에는 스푼을

    왼손과 오른손은 상관없어

 

    순록도 수선화도 포크에 돌돌 마는 거야 스파게티를 우리가 놓친 시간이라고 생각해, 뱀 같은 허물과 킬 힐의 실수와 사랑에 대한 관념을, 식탁 위에 쌓인 침묵과 씽크볼 안에 던져놓은 대화를

 

    좀 어떻게 해봐, 삼켜야 할지 우물거려야 할지, 포크를 사용해서 스푼으로 받치고

 

    오늘도 어김없이 소심한 감각과 섬세한 눈빛은 TV 모니터에 내어준 채

 

    서문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처음 간 레스토랑 입구에서 나는 왼쪽을 바라보고 너는 오른쪽을 바라본다

 

    너는 긴 머리카락의 소녀를 좋아하고

    나는 날씨에 따라 머리카락을 길렀다 잘랐다

 

    너는 활자들 속에서 책벌레가 기어 나오는 강변의 낡은 아파트를 좋아하고

    나는 살아서 움직이는 오로라가 되고 싶어 지상에 없는 애인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네가 그렇게 빨리 죽을지 몰랐지,

    우린 그때 결혼도 이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지

 

    알래스카로 아프리카로 아시아로

    연말이 되고 구세군의 종이 울리기 전에 동방박사들이 따라간 별빛을 찾아 어디론가 나서야지

 

    접시에 남은 소스가 아니라 지도에 없는 별을 따라

 

 

 

 

정혜영 시집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서정시학 시인선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