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이은심 시집

Beyond 정채원 2021. 7. 25. 23:58

  오류의 도서관

 

 

 

   세계는 부드러운 오류투성이고 클래식한 생은 누구라도 물려받아야 한다는 그 말은 옳았습니다

 

   다음 생의 서문 같은 이 조그마한 오후

   모든 책을 다 읽어버린 고요한 나무들의 숲

 

   무명의 나는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뒤꿈치를 들어야 합니다

   인식의 도끼날이 파르스름하게 스며 나오는 당신은 젊었고 젊어서 죽은 당신과는 고딕체로 마주 앉아 경건하므로 잘 찢어지는 장면엔 침을 묻혀야 합니다 나의 픽션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고양이들 책 밖으로 외출할 때는 모서리를 접고 영원과 우애합니다

 

   후끈한 난독을 위해 밀착하는 의자에서 날마다 다른 당신을 탐독하는 나의 번역엔 필경 반역이 수십 년 겉만 핥아온 표지처럼 뻔뻔하고 뻣뻣해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 밑줄을 다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뒤꿈치 둥근 비를 대출할 수 있을 때 그리운 곳이 먼저 난해해지겠습니다 종이의 독재 그 깊은 질감에 엎드려 졸다가 놓쳐버린 당신 여러 번 읽고도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상인 시선 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