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도넛 구멍 속의 잠/이혜미

Beyond 정채원 2022. 1. 8. 17:11

  도넛 구멍 속의 잠


   이혜미


   당신 그 꿈 얘기 좀 해 봐요 초콜릿이 흘러넘치는 도넛 상자를
들고 설탕 사막을 찾아가던 꿈

   고운 모래들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목구멍을 한껏 열어 바람 냄
새를 맡으면 달콤한 입자들이 기도까지 흘러들어왔어요 도넛들과
함께 설탕모래 위를 구르며 이번 생을 자축했어요 이렇게 달콤한
잠이라니 최고다 예상 못한 선물이야 도넛이 많아질수록 새로 생
긴 동그라미들이 늘어서고 그들의 중력이 흰사막을 빨아들이기
시작하고 세상이

   구멍과 구멍 아닌 것으로 나뉠 때 고대에서 온 인간처럼 거대한
도넛의 주위를 맴돌았어요 설탕 범벅이 된 채 동그랗게 모여드는
하늘을 바라보다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우린 아주 긴 구
멍을 가진 도넛들이었군요

   이대로 마음을 시작할 수 있겠어요? 당신 코 고는 소리를 들으
며 낡은 자루에서 설탕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짙어
지는 수면으로 고르게 내려앉는 단잠의 소리

   코 골 때의 당신은 꼭 웃다가 우는 것 같지 잠든 자의 벌린 입 속
으로 흘러들어가 검게 절여진 구멍을 구해올 수 있겠어요? 세 마
디로 이루어진 행성이 있어서 우린 생의 대부분을 그 주위를 맴돌
며 보낸다고요 매일 새로운 궤도의 웃음을 개발하려

   우리가 떠나온 세계에는 더 이상 지어낼 입술이 없군요 깨어나
면서, 단것으로 얼룩진 잠을 털어내면서, 구멍이 도넛을 존재하게
하듯 어리석음은 매번 꿈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내는군요

   기억해요 만약 어젯밤 꿈속에 두고 온 영혼이 있다면 수상하고
달콤한 도넛 속에 웅크려 당신을 기다린다는 거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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