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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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최문자 시집

Beyond 정채원 2022. 3. 31. 23:43

친밀감

 

점점 사람들을 벗어난다

오히려 짐승에게 친밀감이 생겼다

 

이수역 모르는 골목에서 만난 검은 개

그 개는 주인이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제

그가 불러도 내가 가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 개는 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어제도 내일도 내 것이 아닌 동안

어제도 내일도 개의 것이 안 되는 동안

없던 목줄이 생기고 없었던 자세로 끌려가는 동안

한 줌 털에게 한 줌 재를 섞는 동안

 

짐승의 신발이 신겨 있었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는 동안  친밀감이 생겼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오래된 아버지 괘종시계 아래서

 

   그때  그때의 말을 사과하며

   소리가 나지 않게 신발을 벗고

   왈칵 쏟아지는

   기억 몇 때문에

   시간은 검은 콩처럼 익었다

 

   아버지와 나

   둘만 있어도

   아버지라는

   그 슬픔을 내가 알아

   열 가지 이상의 슬픔이 섞여 있지

   그 슬픔 곁에 누웠다 온 이야기 쓰려고 불을 켰었죠

  

   아버지는 커다란 해바라기 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해바라기를 달고

 

   꽃이 커요

   너무 커요

 

   소리쳤지만

   아버지가 늘어진 실을 당기면

   내 단추들은 툭툭툭 여러 번 떨어졌다

 

   그때

   부대끼다 못한 누군가들은 무더기로 해바라기가 되고

있었는데

 

   나는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 씨가 꽃을 달고

   사표를 내고 집으로 오면서 아버지와 해바라기를 의심했지

 

   아버지 옆에 채송화, 채송화 옆에 채송화를 놓았다

   채송화를 지나면 또 채송화 계속 채송화만 쏟아져 나올

때 채송화의 실패가 거듭될 때 채송화가

   영영 죽지 못할 때

   아버지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죽음은 단추도 채우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해

   죽은 해바라기 옆에 채송화를 심고 히말라야로 갔지

 

   우리는 어디까지 갔다 흘러오는 한 몸인가

 

   새학기가 시작되고

   오래된 아버지의 괘종시께는 누군가 정해 놓은 시간을

매번 알렸다

   

 

  발소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밖에 서 있을까

   나의 적막이 그리 무서운가

 

   나는 내가 아니고 사랑이거나 연필이거나  굵은 소금이

거나 열차 소리에 감짝 놀라 작은 죄들이 깨어나는 기도이

거나 했다

 

   발소리가 들리면 누워 있다가도 곧바로 일어나 문을 열

었다 서 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며

   일기를 썼다

 

   발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구름이 지나갔다

 

   소리쳐야 하나? 격렬하게 발소리를 잃어버리는  중이다

러시아 눈 오는 자작나무 숲에 두고 온 코파카바나 해변에

두고 온 자박자박 내가 나에게 걸어오던  발소리, 몇 번 내

가 나였던 느낌이 있었다 이제 오래된 지갑을 잃어버린 허

전함보다 더 가볍게 나를 잃는다 이 땅엔  낮에도  밤이 오

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가 무서운 이야기처럼  들렸다 캄캄

한 반포대교를 건너 향도 없는 향나무  한 그루 멋쩍게  서

있는 창백한 골목에 차를 세웠다

 

   이 도시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소리 나지 않는 죽은 신발을 신고 소리 없이 걸

어간다

   불운도 죽음도 죄와 벌도

   그렇게

   맨발로 걸어서 누구에게로 가는가 보다

 

   내가 자꾸 발소리를 내려 한다

   발자국을 지우려고 함박눈을 기다렸다

 

 

 

 

 

  최문자 시집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민음의 시 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