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감
점점 사람들을 벗어난다
오히려 짐승에게 친밀감이 생겼다
이수역 모르는 골목에서 만난 검은 개
그 개는 주인이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제
그가 불러도 내가 가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 개는 개가 아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어제도 내일도 내 것이 아닌 동안
어제도 내일도 개의 것이 안 되는 동안
없던 목줄이 생기고 없었던 자세로 끌려가는 동안
한 줌 털에게 한 줌 재를 섞는 동안
짐승의 신발이 신겨 있었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는 동안 친밀감이 생겼다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오래된 아버지 괘종시계 아래서
그때 그때의 말을 사과하며
소리가 나지 않게 신발을 벗고
왈칵 쏟아지는
기억 몇 때문에
시간은 검은 콩처럼 익었다
아버지와 나
둘만 있어도
아버지라는
그 슬픔을 내가 알아
열 가지 이상의 슬픔이 섞여 있지
그 슬픔 곁에 누웠다 온 이야기 쓰려고 불을 켰었죠
아버지는 커다란 해바라기 꽃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해바라기를 달고
꽃이 커요
너무 커요
소리쳤지만
아버지가 늘어진 실을 당기면
내 단추들은 툭툭툭 여러 번 떨어졌다
그때
부대끼다 못한 누군가들은 무더기로 해바라기가 되고
있었는데
나는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 씨가 꽃을 달고
사표를 내고 집으로 오면서 아버지와 해바라기를 의심했지
아버지 옆에 채송화, 채송화 옆에 채송화를 놓았다
채송화를 지나면 또 채송화 계속 채송화만 쏟아져 나올
때 채송화의 실패가 거듭될 때 채송화가
영영 죽지 못할 때
아버지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죽음은 단추도 채우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해
죽은 해바라기 옆에 채송화를 심고 히말라야로 갔지
우리는 어디까지 갔다 흘러오는 한 몸인가
새학기가 시작되고
오래된 아버지의 괘종시께는 누군가 정해 놓은 시간을
매번 알렸다
발소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밖에 서 있을까
나의 적막이 그리 무서운가
나는 내가 아니고 사랑이거나 연필이거나 굵은 소금이
거나 열차 소리에 감짝 놀라 작은 죄들이 깨어나는 기도이
거나 했다
발소리가 들리면 누워 있다가도 곧바로 일어나 문을 열
었다 서 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며
일기를 썼다
발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구름이 지나갔다
소리쳐야 하나? 격렬하게 발소리를 잃어버리는 중이다
러시아 눈 오는 자작나무 숲에 두고 온 코파카바나 해변에
두고 온 자박자박 내가 나에게 걸어오던 발소리, 몇 번 내
가 나였던 느낌이 있었다 이제 오래된 지갑을 잃어버린 허
전함보다 더 가볍게 나를 잃는다 이 땅엔 낮에도 밤이 오
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가 무서운 이야기처럼 들렸다 캄캄
한 반포대교를 건너 향도 없는 향나무 한 그루 멋쩍게 서
있는 창백한 골목에 차를 세웠다
이 도시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소리 나지 않는 죽은 신발을 신고 소리 없이 걸
어간다
불운도 죽음도 죄와 벌도
그렇게
맨발로 걸어서 누구에게로 가는가 보다
내가 자꾸 발소리를 내려 한다
발자국을 지우려고 함박눈을 기다렸다
최문자 시집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민음의 시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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