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무한계단육면체/박수현

Beyond 정채원 2022. 5. 12. 00:08

무한계단육면체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로세로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촘촘히 접혔다가

수평선처럼 쭈욱 펼쳐지더니

월식 때 달이 지구그림자에 가리듯이

담배가게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포/홍용희  (0) 2022.07.14
문학이라는 팔자(八字)/김상미  (0) 2022.06.06
새에게 뿌리다/정혜영  (0) 2022.05.05
병점餠店 외/최정례  (0) 2022.04.06
한때 해변이 되고자 했으나/김관용  (0) 2022.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