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모과/도종환

Beyond 정채원 2023. 1. 27. 15:10

모과

 

결실이라는 말을 나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충만이라는 말 안에 들어 있는 무게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기에 대해

감사해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내 몸의 터질 듯한 과육에 주목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나뭇잎들을

나는 더 애틋하게 바라본다

내 몸 안쪽에도 내상의 흔적이 많지만

태풍에 찢어졌던 나뭇잎은 상처가 더 깊어졌고

나 대신 벌레에게 살을 내준 나뭇잎은

몸 한 쪽이 허물어졌다

내게 물방울을 몰아주고 난 뒤 지쳐 바싹 마른 잎과

깊은 멍이 든 이파리들이 여기까지 함께 왔다

내일은 상강

그들 없이 나 온자 왔다면

나는 팔월의 날카로운 시간을 넘지 못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 몸을 붙잡아 준

꼭지의 매일 매일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노랗게 익어가는 시간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이들과 함께 왔다

나는 나무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포엠포엠》 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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