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결실이라는 말을 나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충만이라는 말 안에 들어 있는 무게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기에 대해
감사해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내 몸의 터질 듯한 과육에 주목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나뭇잎들을
나는 더 애틋하게 바라본다
내 몸 안쪽에도 내상의 흔적이 많지만
태풍에 찢어졌던 나뭇잎은 상처가 더 깊어졌고
나 대신 벌레에게 살을 내준 나뭇잎은
몸 한 쪽이 허물어졌다
내게 물방울을 몰아주고 난 뒤 지쳐 바싹 마른 잎과
깊은 멍이 든 이파리들이 여기까지 함께 왔다
내일은 상강
그들 없이 나 온자 왔다면
나는 팔월의 날카로운 시간을 넘지 못했으리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 몸을 붙잡아 준
꼭지의 매일 매일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노랗게 익어가는 시간까지 오지 못했으리라
이들과 함께 왔다
나는 나무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포엠포엠》 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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