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황유원의 시 「아르보 패르트 센터」를 읽고/정혜영(시인)

Beyond 정채원 2023. 2. 23. 12:02

《포엠포엠》에서 본 

 

아르보 패르트 센터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비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운 천연반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하고 그러니 사라지기 위해서라면 35킬로도 한참 부족할 테지만 우선은 그 정도로 시작해 몸을 푸는 게 좋겠지요.

 

먼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보니 최근에 제가 겪은 일이 떠오르는군요. 최근에 외국에서 친구 한 명을 사귀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저는 그 친구와 iMessage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편하고 다행한 일이지만, 저는 때때로 휴대폰이 원망스럽습니다. 편지지에 천천히 길게 오랫동안 써야 마땅할 문장들이 휴대폰 화면에 조각조작 부서진 채 흩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시대에 순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저는 iMessage를 감사하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메시지 창 위에 적히는 우리의 문장들이 소나무 숲처럼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이 끊이지 않는 한, 이 숲은 자라고 또 자라, 언젠가 그 안에 저희 센터 같은 건물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고도요.

 

잠깐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저희 센터 홍보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늘 멀리 가야 본질적으로 만족하는 부류이며, 멀리 가는 방법은 눈 먹던 토끼 얼음먹던 토끼가 제각각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떠드는 동안, 저는 벌써 센터를 떠나 소나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숲으로 들어온 겨울 햇빛이 독서등처럼 켜져 있군요. 이런 독서등 아래서라면 뭘 읽어도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읽고, 잠시 나무뿌리를 베고 잠들어도 좋겠습니다. 그럼 숲이 제 잠에 그려진 악보를 천천히 읽어보겠죠.

 

누구나 물을 마시듯이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타불라 라사Tabuls Rasa> 리허설 첫날 때 연주자들은 음표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악보를 보고는 “음악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었다죠. 휴대폰은 잠시 꺼두겠습니다. 당분간 당신을 찾지 않을테니, 당신도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고, 멀어지려면 아무것도 휴대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요.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

 

 

* Arvo Pärt Centre 홈페이지의 Location에 적힌 글.

** 비킹구르 올라프손 Vikingur Olafsson.

                                                                                                                                     ㅡ황유원 시. 2023 제 6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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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채플시간

황유원의 시 아르보 패르트 센터」를 읽고

 

 

정혜영 시인

                                                                                                                                                                            여행이란 말에 대한 거부다.

                                                                                                                                                                    여행자는 듣기 위해 입을 닫는다.

                                                                                                                                                                     ㅡ 《질문의 책》 에드몽 자베스

 

여기 한편의 시가 있다. 이 시는 여행안내서, 또는 일기처럼 읽힌다. 문장은 담백하고 시적인 수사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나직하게 속삭이듯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잠자코 입을 다물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침묵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사용했다. 이 시를 덮고 나면, 커다란 백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말이 사라진 공간. 거기,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시작된다. 그 음악을 들어보자.

 

누구나 물을 마시듯이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타불라 라사Tabuls Rasa> 리허설 첫날 때 연주자들은 음표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악보를 보고는 “음악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었다죠. 휴대폰은 잠시 꺼두겠습니다. 당분간 당신을 찾지 않을테니, 당신도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고, 멀어지려면 아무것도 휴대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요.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

 

** 비킹구르 올라프손 Vikingur Olafsson.

황유원, 「아르보 패르트 센터」 부분

 

누구나 물을 마시듯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 을 떠올리게 한다. 벽면이 열 네개의 그림으로 채워진 채플엔 벤치가 몇 개 있고 천장에서 빛이 내려온다, 관람객은 최종 목적지에 다다른 것처럼 그 그림 앞에서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었을 감정을 경험한다고 한다. 황유원의 아르보 패르트 센터는 우리를 일상적 공간에서 멀리’ ‘사라져서’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로 데려간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시인의 목소리는 나즉하고 적당한 거리에 있다. 위의 시는 A4 용지 한 장을 채운다. 결코 적지 않는 분량이다. 허지만 문장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휴대폰을 내려놓게 된다. 주위의 친구나 가족, 또는 태평양을 건너오는 iMessage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그때 우리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 ‘음표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악보.

 

거기서 들려오는 음악은 볼륨 제로이다. 두 귀로는 들을 수 없던, 자신의 내면에 들끓던 침묵의 언어가 다가온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고, 먼 곳의 침묵이 들리고 침묵으로 답하는 거기, ()이 하나 놓여 있다. 시인은 위의 시의 앞부분에서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 받습니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라지는 것이 아름답다. 비로소 내가 존재했던 자리가 보이고, 그 자리가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한다. 남루한 일상을 떠나 낯선 나를 마주하는 것을 시적이라고 한다면, 그 얼굴을 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들이 내 집으로 들어오자 빛을 잃고 갑자기 초라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야말로 여행지에서 구입해온 낡은 기념품 같은 게 아닐까?

 

볼륨 제로에 소음이 끼어들고 있다. 고요한 새벽에 쓰레기차 후진하는 소리, 배달 오토바이의 브레이크 소리, TV 화면의 아우성들. 이제 이런 메모를 남겨두고 싶다.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당분간 당신을 찾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문 앞의 메모를 등 뒤로 하고, 황유원 시인이 어느 강연 자리에서 했던 말, 그리고 아르보 패르트 센터 홈피에 남겨진 아르보 패르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또 다시 먼 길을 나서고 싶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꼭 시를 쓰지 않더라도 '시적인 기분'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ㅡ 2019522, 황유원 별마당도서관 강연

 

나는 최근에 86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중요한 결정 중 하나를 여러분과 공유해야 하는 적절한 이유입니다. 아내 Nora와 나는 지금부터 활동적인 삶의 책임과 임무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Arvo Pärt Center팀과의 장기적인 협력은 나의 창조적 유산이 좋은 손에 맡겨진다는 강한 느낌을 줍니다. 평화롭게 내 음악과 생각에 대한 질문을 같이 했던, 내 옆의 센터 사람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나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들, 즉 내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은 모든 음악가, 나에게 영감을 준 예술가들을 만난 행운에 되돌아봅니다. 무엇보다도 내 음악을 자신에게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 당신의 사랑과 헌신은 제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ㅡ  20211018, 아르보 패르트 라울라스 

 

 

 

*비킹구르 올라프손 Vikinggur Olafsson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라고 불리는 예배당

 

 

 

 

정혜영: 2006서정시학》 등단, 시집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

 

 《포엠포엠》 202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