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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정채원의 「상처의 심도」/김윤정 (문학평론가)

Beyond 정채원 2023. 3. 10. 01:48

[계간시평/김윤정]

다시 본질로, 삶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발췌)

 

상처의 심도

정채원

 

 

표피만 탔을까

더 깊은 속까지 타버린 건 아닐까

불탄 소나무 껍질에서 송진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물관까지 탔다면 포기해야 한다

 

모든 상처를 눈물로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데

 

심도의 문제라지만

사랑의 심도

절망의 심도

그 보이지 않는 눈금을 무엇으로 잴 수 있나

 

산불이 남긴

그을음의 높이와 넓이가 각기 다른 숲속

물관을 따라 기어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물은 기억의 중력보다 힘이 세다

 

뿌리만 남았던 아카시아에도 새싹이 자라나고

거북등처럼 타버린 소나무에도 연두 바늘잎이 나오는

새봄이 왔다지만

 

아직도 계속 송진만

눈물처럼 흘리고 있는 나무들이 곁에 있어

쉽게 새봄이라고 소리치지 못한다

 

지나간 불길을 지우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시와함께》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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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시의 "산불"과 그로 인해 재가 된 나무들을 통해 세상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비단 '불'인 까닭은 오늘날 세계의 광포함과 예외없음 탓일 터이다. 전체적으로 압박해오는 악재를 피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  바람의 방향에 따라 그나마 운 좋게 덜 타거나 혹은 더 타는 차이만 있을 뿐, 재난은 보편적이고 공포는 가장 일반적이다. "산불"에 의한 연소의 "심도"는 전방위적인 위협의 삶 가운데 각자가 겪는 상처의 깊이를 나타낸다.

 

모든 나무가 "송진"을 "눈물처럼" 질질 "흘리"는데 그들의 상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까? 상처가 깊을 수도 가벼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복구의 시간도 차이가 있을 것이나 "물관까지"는 불길이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물관"은 생명의 근원인 까닭이다. 연소의 정도에서 상처의 경중을 가늠하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새삼 인간이 겪는 상처와 생명성 간의 연관성을 깨닫게 되거니와, 그러므로 살아 있으라. 어떤 일이 닥쳐도 생명의 근원을 상실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위 시를 통해 시인이 전하는 간절한 메시지가 그것이다. 화자는 그것을 잃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새봄이라고 소리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자다운  말을 한다. "물관을 따라 기어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물은 기억의 중력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픈 자는 "새봄이 와" 조금씩 치유가 이루어져도 여전히 쉽게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모든 상처를 눈물로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데"도 말이다. 그의 곁에 "아직도 계속 송진만 눈물처럼 흘리고  있는 나무들"이 있는 화자가 무엇보다도 허용하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그는 "뿌리만 남았던" 데서 "새싹이 자라나고" "타버린 소나무"에 "바늘잎이 나오"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아프다고 신음하는 나무들을 향해 "불길을 지우는 속도는 제각각이"라며 그들을 위로한다. 그는 보채거나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길을 택한다.

 

이때 불에 탄 숲을 조망하면서 그 안의 고통에 찬 나무들을 위로하듯 찬찬히 응시하는 화자의 시선은 초월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각각의 나무들을 상처의 깊이에 따라 개별화하며 염려하는 화자의 음성 역시 마찬가지로 초월자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병든 나무들의 생명의 근원에 귀를 대며 삶과 죽음을 가늠하는 화자의 손길은 마치 절대자가 피조물을 살피는 모습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화자는 "나무들" 곁에 있지만 "나무들" 보다 높아서 그들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거니와, 그것은 "나무들"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고 "나무들"의 고통을 가장 잘 들을 수 있으며 "나무들"이 온전히 살아나기를 가장 잘 염원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위 시의 독특함은 바로 시의 목소리가 발화되는 지점의 특수함에 기인한다. 그것은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는 존재들을 아프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살피는 태도와 관련된다. 특히 존재들은 제각각의 아픔의 "심도"가 있거니와 그들의 "절망의 심도"에 따라 "보이지 않는 눈금"을 "재"가며 "사랑의 심도"를 대응시키고자 하는 모습은 흔히 종교인들이 신을 향해 간구하는 구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요컨대 상처 입고 아픈 자들을 향해 사랑과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위 시의 시적 자아를 통해 우리는 신의 마음을 엿볼 수 있거니와, 이러한 자세는 인간이 나 홀로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한께 상황에 대해 천착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시의 여러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삶으로부터 구속을 느끼고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자들이 지니게 되는 필연적 의식이다. 시인들은 각자가 처한 삶의 개별성 속에서 보편적인 삶의 본질을 끌어내고 있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저마다 운명을 마주하며 구원을 꿈꾸거니와, 시인들의 개성적인 언어들은 사유를 의미화하는 가운데 언어의 질료성을 발휘한다. 시적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시인들의 음성이고 감정이고 영혼이다. 위 시들을 읽는 일은 시인들의 마음의 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예술가》 202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