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구
검은 상자 안에 개를 넣고 상자 틈새마다 칼을 꽂는다
주문을 외우고 상자는 끝내 열리지 않고 쇼는 끝난다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내 안에 버려진 검은 상자 하나만 남는다
뿌옇게 먼지가 쌓이는 속도로
상자는 내가 되고 나는 상자가 되는 기이한 병을 앓았다
구름을 상상하면 발끝이 흐려집니다 밖에는 아직도 눈이 오나요
상자 안을 맴돌던 질문이 몸 밖으로 뻗어 나와 두 팔이 되고
손바닥에서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갈라지도록
대답은 좀처럼 만져지지 않지
유기된 개가 손을 핥는다
희미한 빛 아래서 오래 기다렸다는 듯
혀로 쓴 유서같이 하늘이 축축하다
창을 열고 싶은데
살아 있습니까
한자리의 꽃병이 잊히는 속도로
우리는 서로의 벽이 되는 병을 앓았다
그래도 무해한 사물이 되고 싶다
어둠 속에 서로를 게워 내며
문 없이 벽을 통과하는 등을 본다
감광(感光)
나는 햇빛을 보면 사라진다
지하의 하얀 방에는 창이 없어서 영원히 살 수 있다
한 선인장이 알 수 없는 틈으로 내 방에 들어온다
태양이 스민 연둣빛 얼굴
따가운 한낮의 가시로 가득한 적의
물관이 차오를 때 들리는 물빛 무지개 소리
맑은 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꼬마 기차에 올라타 사라진다
웃음소리가 흐려질수록 선명해지는 빈 벤치
나는 한쪽 벽에 해를 그리고 다른 선인장을 방으로 유인한다 계속
더 크고 빛나는 해를 그린다
아이들이 놓친 풍선이 날아오른다
전수오 시집 《빛의 체인》, 민음의시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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