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
손택수
의족을 끼고 산다는 게 얼마나 절제 어린 삶을 요구하는지 알지
체중이 불면 구멍 속에 낀 살이 넘쳐 진물이 나고
너무 헐거우면 자신의 몸이 허구렁이 되고 마는 거
알지 에이허브
그대가 찾는 백경이 나의 백지이기도 함을
수심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나의 종이도 품고 있음을
그 바다에 해도에 없는 섬이 있다네
바위를 안고 뛰어들었으나
동여맨 줄이 풀리는 바람에 살아났다는 한 시인은
죽기로 한 바다에 날마다 바위를 빠뜨렸다고 하네
한 십년이나 했겠지 아마 수면 위로 어느 날 바위가 솟은 거라
죽은 바위가 저승까지 다녀온 거 같더만
죽은 바위가 바위를 업고 또 죽은 바위가 바위를 업고
해초가 붙고 조개가 붙고 파도에 쓸려가지 마라 쓸려가지 마라
따닥따닥 따개비들이 붙은 바위섬
이제는 섬에서 조개를 캐며 산다는 사내에게
말이란 그저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떨어뜨리는 바위와 같은 것,
결혼식 날 여식의 손을 잡고 필생의 약속처럼
절뚝거리며 걸어오던 아비의 아들이라네 나는
다리를 삼킨 바다 위에 연필을 깎네 에이허브
볼펜대에 끼운 몽당연필을 절뚝절뚝
짊어지고 온 관을 뗏목 삼아 떠도는 저 끝도 없는 한 장의 심연 속으로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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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에게 ‘백경’은 이렇게 인간적 해석의 그물망과 작살로는 포획할 수 없는 우주적 지知의 상징이된다. 그에게 흰색은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것이었다. ‘거짓 세계에서 진리는 숲속의 신성한 흰사슴처럼 날아가버리기 쉽다. 진리는 조롱하듯이 섬광처럼 이따금 생각나듯이 잠깐만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나다니엘 호손에게 보낸 멜빌의 편지 구절에도 나오는 ‘흰색’은 여백의 존재성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허구적 세계를 찰나의 현현으로 증명하면서 사라지는 이 흰색에 다다르는 여정이 곧 이 소설의 긴 항로인 셈이다. 달을 그리지 않고 주위를 어둡게 채색하여 달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달을 그리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이 멜빌의 소설작법이었다고나 할까
‘백경’은 이렇게 여백으로 존재한다. 여백은 실제 어떤 이미지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 너머의 이미지이며, 기호 너머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인생이나 자연, 혹은 무의식 같은 것으로 의미화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지시하는 여백의 우주에 근접한다. 이탈노 칼비노의 말이 옳다.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시 「백경」은 오랫동안 내 안을 표류하던 글쓰기의 항해를 갈무리한 시다.
『시인시대』 2022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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