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놀이터
강인한 태초에 말씀이 있어도 좋고 장엄한 노을 아래 배경음악을 까는 것도 좋겠지 삼면을 장벽으로 세우고 한쪽은 바다가 좋아 평화로운 바다 지중해 대낮의 길거리 아무 데도 도망칠 곳이 없는 거리에 아이들이 달리면서 손을 흔들어 날아오는 비행기를 향해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하마스의 로켓탄을 던져봐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화우라늄폭탄도 몇 개 백린탄은 반짝반짝 폭죽처럼 아름답지 밤의 커튼 아래로는 신성한 달빛을 좀 흘려줄까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 철근이 꽃대처럼 목을 뽑아 내다보는 거기 어린 사내아이의 연한 뱃가죽에서 삐져나온 창자를 물고 가는 개 포도알처럼 달콤한 소녀의 눈을 파먹는 쥐들 끔찍하게 즐거워서 으스스 소름이 돋는 놀이터 이 풍성한 성찬에 당신들을 초대하고 싶어 유서 깊은 원한을 그윽한 향불로 피우며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봐, 붉은 피와 흰 뼈가 검게 타고 증오가 다윗의 별로 빛나는 그곳. 2009년 1월 20일에 쓰고, 《현대시학》 2009년 3월호 발표, 시집『입술』(2009.7)에 수록한 시 -2008년 12월27~29일,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야간 공습.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2008년 12월에도 처참한 전투가 벌어진 것을 당시에 쓴 「신들의 놀이터」. 다음은 2009년 1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 이스라엘군은 5일 가자지구 중심도시인 가자시티 동부에 진입했으며, 전투용 헬기와 폭격기들을 동원해 공습을 계속했다. 전날 이스라엘군은 가자시티를 포위하는 한편 가자지구를 남·북으로 양분, 통제력을 확보했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서는 530여명이 숨지고 2500명이 다쳤다. 이스라엘군은 지상 교전으로 1명이 전사했다.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접경지대에 초강력 폭탄 벙커버스터를 퍼부은 데 이어 유전질환을 일으키는 열화우라늄탄과 제네바협약 상의 금지무기인 백린탄까지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 프레스TV는 가자지구 노르웨이 의료진의 말을 인용, “부상자들에게서 열화우라늄탄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영국 더타임스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 외곽에서 화학무기인 백린탄을 썼다고 보도했다. 강인한 시, 「신들의 놀이터」 해설 / 정채원 현실의 총체성은 무너져 내리고 작은 파편들로 해체된 세계에서 현대예술은 '유기적 총체성'이라는 낡은 미의 이상을 파기한 지 오래되었다. 미학에서 미의 체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아름다운 대상의 체험과 숭고한 대상의 체험이다. 숭고한 대상의 체험은 대개의 경우 우리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다. 최근의 세계를 보면 '충격과 경악'이라는 현대예술의 원리가 마침내 현실에서 전쟁의 원리로 실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화랑과 박물관에서 걸어 나와 실제의 끔찍한 현실이 된 것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재현되고, 폭격으로 산산이 부서져 내린 폐허와 갈가리 찢겨진 인간의 형상들이 그렇다. 오늘날 인간의 자기파괴력은 미의 영역을 벗어나 이미 숭고의 차원에 도달했고 신무기의 파괴력은 더 이상 인간의 규모가 아니라 신의 규모에 도달한 것이다. 어떤 충격이나 끔찍하게 무서운 사건도 안전한 거리가 확보된 곳에서 바라보면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놀이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인간 내면에는 폭력의 본성이 잠재해 있기 때문일까? 안전한 거리가 확보된 곳에서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폭격은 이스라엘 구경꾼들에겐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되었다. 파괴의 규모가 커질수록 쾌감은 더 늘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믿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폭력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일까? 십자군전쟁으로 무참한 살육을 저질렀던 중세에 그들은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듯하다. 더 가공할만한 신무기들을 갖추고 있기에 그 결과는 더 비인간적이고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잔혹하다. 조종석의 스크린을 통해서 수행하는 전쟁은 전자오락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전쟁은 그들이 믿는 신들의 즐거운 게임이 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은 신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숭고를 아름다움으로 체험하는 데에 필요한 ‘거리’가 결여되어 있는 곳, 폭탄이 언제라도 나와 내 가족의 머리에 떨어질 수도 있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뿐일 것이다. 아득히 먼 지구의 한 점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을 TV 뉴스를 통해 먼 하늘의 불꽃놀이라도 관람하듯 지나친다면, 커피를 홀짝거리거나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리모컨을 조작한다면 우리도 전쟁을 오락처럼 즐기는 인간들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토를 일으킬만한 그 참혹상을 외면하고 싶어 얼른 채널을 돌리고 싶어질 수도 있다. 가능하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무거운 질문들과 시인은 단호하게 대면하고자 한다. 어째서 신의 이름으로 싸우는 맹목의 저들을 신은 그대로 방관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저 어린아이들과 민간인들의 영혼은 어떻게 위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일까? 그 숱한 희생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신이 진정 있다면 그들의 신은 어떤 답을 마련하고 있는지 「신들의 놀이터」는 묻고 있다. 단지 그 참혹상을 신문기사를 쓰듯 가감 없이 사실 그대로 보여주면서 묻고 있다. 문학을 통해 어떤 질문을 어떻게 던질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ㅡ2015.11. 4 |
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
'비평·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 오든의 「장례식 블루스」/신형철 (0) | 2023.10.22 |
---|---|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 / 신형철 (1) | 2023.10.17 |
기형도의 「진눈깨비」 / 박소란 (0) | 2023.10.02 |
[자작시 해설] 1965 / 강인한 (0) | 2023.09.19 |
미학/김언 (0) | 202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