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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정재학의 「녹(綠)」해설 / 박성준

Beyond 정채원 2014. 8. 27. 09:15

정재학의 「녹(綠)」해설 / 박성준

 

 

  녹(綠)

 

     정재학 (1974~ )

 

 

   이십년 넘은 아파트에서 녹물이 나온다. 녹물로 밥을 지어 먹고 녹차를 끓여 먹고 양치를 했다. 녹물을 많이 마시면 우울해진다. 종일 무기력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눈에서 쇳가루가 검출되었다. 머리가 녹슬고 가슴이 녹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도 녹슬었다. 노란색을 보면 우울해진다. 노란 나비가 나에게 침을 뱉는다. 노란 꽃도 싫어지고 은행나무 잎도 싫어졌지만 난 노란 살덩어리가 되어 누런 오줌을 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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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순간순간 부서지기 위해서 스스로를 타인으로 만든다. 서로가 얽히려고 양보하고 위로하며 위장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는 내가 잘 알고 싶던 타자일지도 모른다. 불연속 된 나를 좀처럼 재현하기 힘들어, ‘나’의 부재를 현시하면서 ‘너’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잠깐이 살아있음이 아닐까.

   정재학 시의 알레고리는 겨냥하려는 적들이 분명하지만 겨냥해야 할 명분이 당연하지 않아서 새롭게 편성된 감각세계를 선보일 때가 많다. 오래된 아파트 내부에서 시작된 녹이 주민들의 생활이 되고, 몸이 되고, 생각이 된다. 적당량의 ‘노랑’을 감각하고 또 배설하고, 적절한 우울을 나누면서 그렇게 그들은 내부의 결함 때문에 비로소 아파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삶의 기미가 동일하게 작용되기 위해서라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들여 사람을 정독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에게 부서질 줄 모르는 위악과 견고가 된다. 결함을 나누기가 힘이 든다면 결합 또한 애쓴다 해도 순간뿐이다.

   나를 오래 기다려준 사람이 있다. 실패한 사랑이거나 사랑했던 실패다. 도통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을 때마다, 누군가를 지우려고 했던 혁명들을 생각한다. 우리가 서둘러 결정하고 야합했던 것들은 얼마나 무의미한 의도를 남겼을까. 녹이 슨다. 삶의 부식된 자리를 만지고 나면 다른 윤리의 통증이 있고, 그 또한 살아있음에 윤리라고 믿어야겠다.

 

   박성준 (시인·문학평론가)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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