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러 (외 2편)
이성미
너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 비극적 감정에 젖는다.
욕조에 몸을 담그듯.
네가 이야기 속에 나를 구겨 넣는다.
얼굴과 목소리가 희미해져서 나는
네가 준 이름표를 달고, 답이 결정된 질문에 답한다.
네가 정해준 배역을 연기한다.
이 이야기 밖에는
내가 두고 온
모래알같이 작은 얼굴들.
그 얼굴들을 지키러
너의 이야기에서 나가야겠다.
나의 벽돌, 나의 지붕,
나의 과자, 나의 머리칼이 없어도.
내 손으로 만드는 이야기. 나의 형식.
나의 단어. 나의 노래. 나의 숨결.
너의 이야기 속을 너는
나의 이야기 속을 나는 걸어간다.
가끔 마주친다, 새벽 안개 낀 건널목.
낯선 사람을 잠시 보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건널목을 건넌다, 반대 방향으로.
휴가지 사람들
사람들이 달려온다, 탬버린을 흔들며.
그들은 잘 웃고, 아이들에게 너그럽다. 그건 여름에 대한 예의.
사람들은 느릿느릿 걷는다, 우아한 우주인처럼.
머리 대신 풍선을 달고
그림자의 팔다리를 길게 늘인다.
가게 주인은 까맣게 탄 얼굴과 반짝이는 눈.
내일 그는 퇴직을 앞둔 풀처럼 시들고, 일 년 내내 얼굴을 비워둔다.
도시 사람들은 장전해둔 권총이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밤의 발톱이 두꺼워진다.
밤은 집을 서둘러 접어버린다.
사람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문을 연다.
방문을 열고 자동차 문을 열고
사무실과 가게 문을 연다.
저녁엔 산책을 하고
너무 많은 발가락을 똑, 똑, 부러뜨리다가 달력을 보며 잠든다.
셜록 홈즈 중고 가게
셜록 홈즈는 의기소침하게 노년을 보냈지.
기술을 살려 예술을 해볼까. 어느 날 여생에 대해 생각하다가.
셜록 홈즈 중고 가게를 열었어.
처음 한 작업은
탈모로 고생하는 개에게 고양이의 털을 이식하기.
홈즈는 고객에게 단서를 달았대.
개는 더듬더듬 걷게 될 것입니다.
내일 할 일은 햇볕을 쬔 모래알을 밤하늘에 뿌려놓기.
손끝으로 별을 보게 하고 싶어요. 고객은 딸을 위해서라고 울먹거렸대.
내일 밤은 까끌까끌 깊어갈 것입니다.
명함 뒷면에는 이렇게 적었지.
똑같이 만들 수는 없습니다.
홈즈는 고양이처럼 골목을 돌아다니며 재료를 찾아다니지.
말레비치 가족이 버린 정사각형.
몬드리안 가족이 버린 직사각형.
각이 안 맞아 버린 것에서 더 나은 도형이 나오는 법.
늦은 밤에 가난한 예술가 루팡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지. 작품에 서명을 할까, 말까.
홈즈는 중얼거렸어.
공동 저수지에서 콩나물은 자라고.
지하수에 파이프를 대고 각자 수도꼭지를 틀지.
홈즈는 마을회관에 모인 노인들에게 물어본대.
루팡이 좋아, 홈즈가 좋아?
—시집『칠 일이 지나고 오늘』(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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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미 / 196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칠 일이 지나고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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