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귤림의 꽃들은 누굴 위해 피었나/한경용 시집

Beyond 정채원 2023. 12. 20. 22:48

 

 

바람을 안은 집에서 세한도를 보네

ㅡ추사 김정희

 

 

서귀인의 귀와 밀방아도 힘을 잃고

대정의 소나무가 불그스레 변해 갈 즈음

반딧불 호롱불 삼아

오름이 달래고 바당과 말하는 위리안치

눈에 어려진다

당신이 차린 밥상, 칭얼대는 새끼들

거친 붓 하나

물속의 마음도 추위를 벗하면 그릴 수 있겠다

먹물이 시리다 백지 위를 숨 쉬게 하라

바닷가 집 발치에서  활쏘기 하는 새

제주의 울음으로 휘갈길 때만

어쩌면 섬 속의 섬, 혹한을 즐길 수 있으랴

매어 둔 배들과 함께 묶여 있으니

고인 시간 속에 칼바람이 그려지네,

내 안의 내방객이 검은 바위가 될 즈음

한라여, 바다로 사르고만 있으련가

까마귀 우는 저녁, 제주목의 군졸들이 당도하겠다

나막신 신고 도롱이 차림, 마음을 정해야겠다

바람을 안은 귤중옥, 감귤 창고 앞에서

아비 소나무를 세 그루의 잣나무가 부른다.

 

애제자 이상적이 연경에서 사 온

책들과 문방사우 객주 편으로 잘 받았다

그대는 나에겐 문방 오우,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네"

우는 새랑 재우고  웃는 새랑

쉰다리* 밥이라도 먹어야 겠다

이 밤을 돛대와 삿대로 저어 갈 즈음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

나를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한다"**

 

 

 

한경용 시집 《귤림의 꽃들은 누굴 위해 피었나》, 시작시인선 0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