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이승희 시집

Beyond 정채원 2024. 8. 5. 23:25

 

 

   어떤 마음에 대하여

 

 

   물속에 오동나무를 심는 마음이 있다 연꽃도 그런 마음 모

란도 그런 마음 오리 두 마리도 그런 마음이어서

 

   가만히 헤엄을 치게 하였다 그런 마음을 싣고 돛단배가 온

 

   마음에 무엇을 들이는 마음 그런 마음이 더욱 따뜻하여 소

나무가 자란다 바위 속을 지나 지붕 끝을 지나간다 머리가 붉

은 해에 닿고서야 편안해진다

   지붕에는 매화꽃이 피었다 잘 모르는 마음인데 잘  알 것 같

은 마음이다 마치 씨앗이 백 개나 된다는 유자가 막 벌어진 것

같은데 어떤 논리 없이도 알 것 같다 이를테면 지금 여기는 너

무 멀고 멀리 거기는 지금 내 앞에 와서 머무는 것 그런 것처럼

없는 이가 자꾸 나를 보러 오는 것이니

 

   물속에

   연꽃은 연꽃이 아니고 모란은 모란이 아니고 복숭아는 복숭

아가 아니어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

   그리고

   거기서부터 걸어와야 하는 것

   그리고 나를 지나가야 하는 것

 

   높은 누대

   푸른 기와

   오색 꽃구름을 밟으며 오시라고

 

   붉은 문을 열어두었다

   슬픔을 마음껏 열어두고

   폐허가 한없이 늘어나 반짝였으므로

 

   작약이 피었다

 

 

 

이승희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시인선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