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서울, 2023 봄 외 1편/장석남

Beyond 정채원 2024. 8. 11. 14:48

서울, 2023 봄 

 

장석남

 

 

유골함을 받아 안듯

오는, 봄

이 언짢은 온기

 

산 송장들을 만드느라

관청의 서류마다 죄가 난무하고

 

공원의 쇠 울타리 안에서 정원사들은 날 선 법복 차림으로

꽃나무 뿌리마다 납 물을 붓고 있네

화창한 사오월의 봄날에도

납빛 꽃들이 신문지의 비열한 제목처럼 만발해 오리라

 

용답역 모퉁이에서 검은 무쇠 칼을 움켜쥐고

더덕 껍질을 서걱서걱 긁어 까는 가난한 할머니만이

망명한 봄을 숨겨 간직하였구나

 

나는 잠시 더덕 내음의 면회객이 되어 저편의 봄을 엿본다

흙 껍질 속의 흰색! 장지壯紙 빛, 신비한 향기를 맡으며

백범白凡의 그 두루마기 빛깔까지 허망 걸어가 보네

 

유골함의 온기 같은

지금 2023년 봄볕을

기록하여 두네

 

 

 

 

새 그리기

 

 

 

새를 그리고 그 옆에 새장을 그린다

그러면 자유를 그린 것 같다

새는 새장을 모른다

 

새장은 새를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나를 향해 나는 모르는 죄가 다가오듯이

우리를 향해 우리가 모르는 벌이 다가오듯이

 

내 이름을 쓰고 이름 위에 새를 그린다

새가 내 이름을 가지고 날아오를 것 같다

날다가 그만 놓아버릴 것 같다

 

새를 그린다

오래 앉아 있는 새

새를 향해 하늘이 조금씩 조금씩

붉은 하늘이 야금야금 다가온다

 

 

 

 계간 《포지션》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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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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