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더 멀고 외로운 리타/이장욱

Beyond 정채원 2024. 8. 18. 22:41

더 멀고 외로운 리타

 

이장욱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북극이라서 여행이라도 하듯이

여기가 적도라서 탐험이라도 하듯이

 

매일 장례식이 열려요. 국가정책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대. 우울증이 있음. 이어폰을 귓속 깊숙이 밀어 넣고

 

집에 갔다.

집을 나왔다.

집에 갔다.

 

조금 더 먼 곳에는 북극의 펭귄과

날지 않는 새들

내 귓속에 내리는 겨울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음악과

바이러스

 

하지만 이봐요,

펭귄은 북극이 아니라 남극에 산다고.

바이러스는 혈관이 아니라……

 

당신의 가까운 생물이 사라졌어요.

당신의 먼 사람이 앓고 있어요.

어제는 외로웠던 누군가가

내일은 지상에 없고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오지 않았다.

 

사라진 리타가 시를 읽네, 북극에서

수유리에서

내 귓속에서

 

여행자가 실종되었다는군. 열대야가 다가오고 있어요. 빙하기가 시작되었다. 코인이 급등했대. 다 집어치워!

 

만나러 와주어요. 여기가 불가능한 곳이라도

 

만나러 와주어요. 나의 먼 꿈속으로

북극에 내리는 뜨거운 비

열대우림에 쏟아지는 폭설

이곳에서 새들은 헤엄치고

펭귄은 날아다니죠.

 

좀 조용히 해줄래?

음악이 안 들려.

내 귓속에서 자꾸 중얼거리는 리타 때문에

저기 저 빗속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더 멀고 외로운 리타 때문에

 

 

 

계간 《시와 세계》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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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음악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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