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장석남
신발은 구겨져 있다
가죽 구두
옷장의 옷들이 나프탈렌에 절어 있다
바지 하나는 벨트가 끼워진 채 냉장고 옆에 쳐박혀 있다
오래된 냉동고가 가늘게 신음한다
무대는 갑자기 꺼져 버렸다
나는 꽃을 든 채
피를 흘린다
교도소로 납품되는 형벌들
죄가 돈이 되는구나
큰 죄가 큰 돈이 되는구나
죄를 짓는 종사자들
시를 짓다니! 멍청이 같으니라고
오래된 한탄 속에
노을이 목을 베러 온다
노을을 목에 감는다
국적란에 붉은 선을 아름답게 긋는 화가
시비詩碑의 전문을 긁어 백비를 만드는 시인
재생되는 돌의 질감
배경에 깔고 천천히 나는
나를 그린다
《POSITION》 202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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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존재는 죽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새로이 살려는 존재다. 죽음을 통해서라도 새로이 살려는 사람이 시인이다. 저 노을로 목을 감는 행위는, 몰락해가는 이 세상에서 아직 남아 있는 빛으로 예전의 자신을 지우고는 새로운 자화상을 그리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다. 즉 그 목에 건 노을빛은, 화가가 국적란에 이름답게 그은 '붉은 선'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국적이니, 명예니 하는 것들을 지우기 위한 붉은 선, 국적란에 이 선을 긋는 행위는, 삶에 달라붙어 있는 그 모든 인위적인 것들을 없에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하여, 붉은 선 긋기는 "시비詩碑의 전문을 긁어 백비를 만드는 시인"의 행위와 동궤에 있다. 이 행위를 통해 재생되기 시작하는 것이 있다. "돌의 질감"이다. 눈을 가리고 있는 인위적인 것들을 지워내자 자연의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여 세계는 새로이 싱싱하게 현상되고, 시인은 질감이 되살아나고 있는 이 세계를 "배경에 깔고" 자신의 자화상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이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인위적인 껍질을 벗은 모습 아닐까. 저 시인의 자화상을 시의 장소로 치환하여 말한다면, 시는 새로이 현상하는 세계 - 이 역시 타자다- 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껍질을 벗고 돋아나는 '있는 그대로의' 얼굴이 드러나는 장소라고 하겠다.(발췌)
이성혁 평론가
《시로여는세상》 202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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