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외투/이장욱

Beyond 정채원 2024. 11. 27. 21:42

외투

이장욱

 

 

당신은 외투를 입혀서 나를 숨겼네.

외투에는 얼굴이 없고

다리도 없고

외투만이

 

외투는 다른 것을 뜻하지 않고 그냥

외투일 뿐인데

그것은 여름 내내

옷장 안에 걸려 있었을 뿐인데

옷장 안이니까 어둡고

적막했을 뿐인데

 

겨울에는 시청역에도 가고 지하도라든가

꿈속에도 가고

문득 서해안의 바닷가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문득

무서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외투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갑이 없고 명함이 없고

목이 없네.

성기가 없다.

아아, 무의식조차……

 

당신, 어디 있어요?

어디로 영영 사라졌어요?

겨울비는 내리는데

나는 온몸이 젖어 이토록 무거운데

나의 깊은 곳까지 그것이

그것이

스며드는데

 

 

《유심》 2024 겨울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아름다운 날/정숙자  (2) 2024.12.12
공우림의 노래 · 44/정숙자  (0) 2024.12.09
돌의자/박수현  (0) 2024.11.25
열린 문 열기/이화은  (0) 2024.11.21
제갈량이 죽은 나이를 지나며/서동욱  (1) 2024.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