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어
― 정숙자 시인을 떠나보내며
며칠간이라도 앓다가 떠나지 않고 쌀을 씻다 느닷없이 떠나버린
그녀를 견딜 수 없어
이젠 밥을 지을 일도 밥을 먹을 일도 없어진
그녀를 견딜 수 없어
화요일에 금호역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월요일에 떠나버린
그녀를 견딜 수 없어
밤 1시에도 전화를 걸면 “네, 선생님!”하고 반갑게 받던 그녀
보내온 시집들에 일일이 손편지를 쓰고 있었다는 그 다정한 목소리
들을 수 없어 견딜 수 없어
‘밀로의 비너스’ 없어진 두 팔이 들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내 엉뚱한 질문에도 맞장구를 치던 그녀의
끝없는 침묵을 견딜 수 없어
오징어의 내장을 미끼로 오징어를 잡아 올린다는 페루의 어부들 얘기를
밤새 주고받다 잠을 놓친 우리 둘인데
다시는 들어주지 않고 다시는 답하지 않고 다시는 웃어주지 않고 다시는 부정도 하지 않고
내내 나 혼자 생각하다 제풀에 그만두게 하는
그녀를 견딜 수 없네
‘삶이란 견딤일 뿐’이라던 그녀를 견딜 수 없네
『시산맥』 202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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