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피아불식 외 1편/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4. 7. 6. 11:39

 

피아불식彼我不識

 

 

 

적과 아군을 간단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개라고 믿으면 늑대가 되고

늑대라 믿으면 개가 됩니다

 

개와 늑대는 같은 종입니다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먹으면 좋다는

수박과 오이는 박과입니다

손바닥을 뒤집지 않아도

같은 과입니다

 

적이 아군이고

아군이 적입니다

 

구분하는 건 쉽습니다

구분할 수 있을까요?

 

, , , , , ,

 

적과 아군을 구분하면 추위에 좋다고 합니다

같은 조상이지만

더위에도 좋다고 합니다

 

 

 

 

 

논픽션(Nonfiction)

김범, 바위가 되는 법

 

 

 

표범처럼 목이 짧아진 기린이 치타를 잡으러 달려간다, 잡힐 듯 잡힐 듯 치타는 죽어라 도망치고. 배가 불룩한 임산부가 되어버린 망치가 누워있다. 나는 치타에게 총을 겨눈 채 10년이 가고 100년이 간다, 아직도 쏘지 못한 채.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한 척이 거기 있다. 자신을 새라고 믿는 나무 한 그루가 그 곁에 있다.

 

앞에서 보면 늠름한 갈기를 날리는 암사자 한 마리, 그의 뒷모습은 깡통과 비닐봉지와 고무호스로 얽히고설킨 내장이 드러난 몸뚱이, 그 곁에 두 개의 흰 손을 애달프게 구부려 백조가 된 돌멩이가 있다.

 

몽돌은 12시간 넘게 시를 배우는 중이다. 어깨 너머로 시를 배운 다리미와 선풍기가 졸음 섞인 헛소리를 하는 동안, “너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 뿐이다라고 반복해서 들려주는 모니터가 온종일 왈왈거리고 있다.

 

나는 바위가 많은 산비탈 한 귀퉁이에 눕는다. 몸에 이끼가 끼고 벌레들이 집을 지어도 숨소리를 죽이고 꼼짝하지 않는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언젠가 바위가 되는 날까지.

 

누군가 작은 동굴을 찾아 그 안에 대고 소리친다. “너 안에 있니?”

 

 

 

《시와세계》 202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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