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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서정시에서 '벼락 같은' 서정시로 나아가는
초기의 현실 고민으로 돌아와 더 깊어지고 신랄한
완숙한 시편들이 주는 감동과 현실을 돌아보는 전율
그렇지 않고는 삶 내내 앓아온 그리움이 꼭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 찬란히도 타들어가며 흐르던 그 노을을 닮았을 리가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육지로 떠나고 할머니와 섬에 남아 노을을 바라보던 소년 시절을 시인은 지나왔다. 그는 "대여섯 살 때부터 집 뒤 언덕에서 날마다 보아왔던 노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늘의 한때만은 아니었던 듯"하다면서 "진홍과 보라가 뒤섞여 어디론가 고요히 흘러가기도 하고 타들어가기도 하던 그 빛깔들의 찬란한 운행이 저편 어딘가에는 여전히" 있었다고 쓴다.
▲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1991) 이후 9번째 시집을 내면서 '망명이 끝났다'는 장석남 시인. 그가 이번 시집에서 지향하는 새로운 '서정시'는 벼락처럼 순간의 진실을 비추는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장석남 시인이 8년 만에 내놓은 새 시집'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에 수록한 '노을'이다. 노을에 깃든 '삶 내내 앓아온 그리움'의 서정은 9번째 펴낸 이번 시집에서 그 빛깔이 보다 깊어지면서 새로운 서정으로 나아간다. 오래 노래해온 자연의 서정은 익을 대로 익었다.
꽃나무는 심어놓고/ 잊었더니만// 어느 날/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첫 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보니/ 세상에 와서 처음 업어보는 연인의 무게만 하겠네/ 상기된 미소, 그 무게만 하겠네/ 숨이 막히도록 무거운 피어남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 갈라나?/ 숭굴숭굴한 진자줏빛 무게여//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여 _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전문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라니! '대숲 아침 해'는 "굶주린 호랑이처럼 쏟아져 들어와/ 내 넘치는 불면의 살들을 내주니/ 서둘러 먹고는 입술을 핥으며/ 남쪽으로 돌아가"고, "또 한번 창에 들이닥치는/ 허기진 눈빛 있으면/ 서로를 핥으며/ 어둠을 덮으리"라. 물에는 노래를 심는다.
물에 노래를 심다니요/ 그것도 지금 노래가 아니라 훗날/ 하지 때의 그 노래를 심다니요/ 매일 아비를 잃는, 그믐마다 어미를 잃는/ 울음 아닌 노래를 심다니요// 물에서 피는 꽃이라니요/ 꽃에서 나는 노래라니요// 쌀농사가 아닌 노래 농사라니요/ 매년 풍년의 노래 농사라니요 _ '연꽃 심을 때' 전문
전통적인 서정시의 기준에서 보면 자연의 풍광의 정수를 이만큼 숙성시킨 경지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은데, 그는 자꾸만 돌아보며 '가면'을 쓴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네/ 분 뚜껑을 열고 조용히/ 나를 지우기 시작하네// 오늘 하루/ 걷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나를 지워가던 일// 귀갓길에서 모란의 몰락을 보았네// 오늘은 아주 조금 나를 걷어낸 것으로 족해/ 거울 앞에서/ 얼룩진 부분부터 지우네/ 저녁은 지워지지 않네 _ '분장실에서' 전문
지난 시집'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낼 때도"운명적으로 더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았고 그런 장면들이 더 많은 게 이전과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번 시집이야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대학로 카페에서 만난 시인은 이제 조금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응시하게 된 거라고 말한다.

"그 전보다는 그렇다. 그 전에는 뺨에 서쪽을 빛내면서 노을에 비친 나의 부끄러움이나 꽃을 매개로 이야기했는데, 이제 내가 가면적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려고 한 거다. 이 세계와 진짜 타협하면서 적응하면서 산다는 게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삶인데, 그래서 분장을 지운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족해, 뭐 이런 얘기들도 쓰고 그런 건데, 그걸 더 인식한 거다. 우리 모두 가면 쓰고 사는데 가면을 벗으면 나을까 뭐 이런…"
이런 준열한 자아 성찰은 그동안 써온 서정시에도 관철된다. 이른바 서정시라는 것이 정말로 진솔한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인지, 아니면 감정을 가공하고 왜곡하는 또다른 가면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문학적 가면'을 벗어던진, 그가 생각하는 진짜 '서정시'란 어떤 것일까.
서정시를 쓰십니까?/ 아니요 벼락을 씁니다/ 벼락 맞을 짓이라는 말을 들어봤나요?/ 벼락 맞을 짓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벼락에 고하는 글을 씁니다// 벼락에 고하는 글/ 화평한 서정시를 쓰고 싶습니다/ 위선과 비열, 몰염치와 야비, 교활하기까지 한/ 그 가면들을 순간의 빛 속에 가두고/ 때리는// 서정시를 쓰십니까?/ 아니요 '서정시'를 씁니다/ 벼락같은 _ '서정시를 쓰십니까? 전문
그는 이 시편 제목 아래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일부를 제사(題詞)로 부기해놓았다. 사회적 혼란과 폭력 속에서 전통적인 서정시를 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토로한 것인데, 장석남이 브레히트를 인용한 이유는 근년의 한국 사회 안팎을 돌아보면 자명해진다.
"벼락이 칠 때 번갯불에 순간 비쳐지는 모습이 환하게 가둬버리는 진실, 그것이 서정시일 것이다. 과욕이겠지만,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서정시를 쓰고 싶다. 그 벼락불이 물리적으로 진짜 모습을 계속 비출 수는 없겠지만 순간이라도 진짜 모습을 보게 한다."
그는 그동안에도 이런 서정시를 지향해왔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비극의 시대에 고통받았던 브레히트나 두보, 성삼문, 기형도 같은 이들을 떠올리면서 보다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새로운 '서정시'를 고민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물들은 4부에 집결돼 있다.
눈이 오면/ 눈만 오지 않아/ 푸르스름한 메아리 같은 것이 눈발 저편 허공에는 맴돌며 떠 있지// 조광조는 파랑/ 파랑 소나무/ 아직도 파랑/ 소나무// 눈 오는 날엔 더 이쁘고/ 말이 있고 문장이 얹혀 쌓이지 희고 또/ 조용하고/ 선천적으로 정중하지/ 눈이 오다 그치면/ 눈만 그친 것은 아니야/ 붉은 메아리가 하늘을 덮은 적이 있거든/ 소나무는 우뚝, 지나던/ 하늘의 말(馬)처럼 서 있지// 좀스러운 인간들 이야기는 없지 _ '조광조(趙光祖)' 전문
조선 중종 시대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치 개혁을 시도한 상징적인 조광조(1482~1519)를 아예 제목으로 내세운 시편을 쓴 배경은 오래전 개혁가와 성씨가 같은 인물의 수난 때문이었다. 개혁가이지만 시대를 이기지 못해 훈구파에게 억울하게 당한 그이였고 순순한 신념을 가졌지만 허무하게 사라진 인물이었는데, 시대를 넘어 반복되어 희생되는 존재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서울, 2023, 봄'은 봄볕마저 '유골함의 온기' 같은 것이었다고 기록한 그는 작금의 법과 그 법을로 마술을 부리는 기득권자들의 놀이판을 들여다보며 신랄하게 풍자하는 '서정시'로 거듭 나아간다.
나는 법이에요/ 음흉하죠/ 하나 늘 미소한 미소를 띠죠/ 여러개예요 미소도/ 가면이죠/ 때로는 담벼락에 붙어 어렵게 살 때도 있었지만/ 귀나 코에 걸려 있을 때 편하죠/ 나는 모질고 가혹해요/ 잔머리 좋은 종들이 있거든요/ …/ 나는 만인 앞에 평등해요 헤헤/ 음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죠/ 원칙이 있지만 아주 가끔만 필요하죠/ …/ 나는 물처럼 맑고 평등하다고 말하죠/ 유죄도 무죄도 다 나의 밥이죠/ 너무 바빠요 너무 불러대니 쉴 틈이 없죠/ 나는 법이에요/ 양심 같은 건 우습죠 이득 앞에서/ 그깟것 금방들 버려요 시류에 어긋난 소리죠 _ '법의 자서전' 부분
▲ 장석남은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면서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할 거짓말'이라고 표제시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이른바 '법 기술자'들에게 법이란 절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마술을 부리는 도구인 셈이다. 장석남은 그 법이 운용되는 재판정을 '마술 극장'에 비유한다.
지난 공연 대본 중 하나가 유출되었다 공동창작이었는데 단역 겸 참여 작가 중 일부가 이탈했다 그럼에도 공연은 그대로 진행되어 홍행했다 비극의 주인공은 재상을 지낸 거물이었다 늘 그렇듯 공생하던 흥행 광고업자들의 힘이 컸다 이 극장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각본 없이 어느 날 무대 위로 끌려 나온다는 점이다 (…) 드라마의 백미는 대반전이지만 이 극에서 그런 일은 없다 대본가와 공연자들이 모두 같은 먹이사슬 안에 있기 때문이다 _ '마술극장2-압구정 옛주인 같이'부분
대본가란 검사들이고, 그들이 작성한 공소장이 대본인 셈인데 나중에 진실이 판명된다 해도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그는 써나간다. '역사에서 반전을 이루겠지만 먼 훗날의 역사 따위는 이 극장에서는 인기 대본가들의 야식용 냄비 받침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과 권력의 연극'이 끝난 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정에서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장미 정원에 공연이 한창이다/ 대본 따위는 없다/ 장미가 관통해온 길을/ 저 마술 극장의 대본가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왕인 이해득실 전하가 쫓겨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마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_ '마술 극장 3-장미 정원'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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