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계단 *
강우근
당신이 옷장 속의 옷을 고르고
바깥을 향해 나가야 하는 일이 버거워질 때
쓸리는 옷자락을 이끌고
내려올 때
나는 당신이 오르내렸던 수많은 계단
가만히 멈춰 서서
사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나는 15초 동안 두 손으로부터 해방된 장바구니
7분 동안 풀썩 주저앉아 공상에 빠지는 얼굴
3개월 동안 거미가 만든 거미줄
그리고 지금 어디를 가야 하는지 잊은 채로
오르내리던 당신의 발
나의 일은
마음껏 두리번거리는 것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봐
영혼이 발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르는 것을 느껴봐
당신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문득
온 마을을 달릴 때가 있지
당신은 경기장 양쪽 편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
전공과목으로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
태어난 순간 가진 외형이 커져 가는 것을 나날이 거울을 통해서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지
시간이 지날수록 얼어가는 주변 사람을 녹일 말을 찾지 못할 때가 있지
새벽에 깨어나 불을 켤 수도 불을 끌 수도 없을 때가 있지
희미한 구름으로 잠시 흘러가는 당신을 알아
멈춰 설 때
양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연주하는
당신의 뼈를
모호한 음악을
* 일본의 현대 미술가이자 소설가인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명명한 초예술 토머슨 제1호. 겐페이는 쓸모없는 것의 대명사를 초예술 토머슨이라고 말했는데, 순수계단은 오르고 내릴 수만 있고 어디로 통하지 않는 목적을 상실한 계단이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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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 / 1995년 강원도 강릉 출생. 202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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