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신발을 생각하다/황정산

Beyond 정채원 2025. 1. 24. 10:08

신발을 생각하다

 

황정산

 

 

 

신발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 갑작스런 공포를

초등학교 교실에서 두 번, 술집에서 한 번

상갓집에서 또 두 번 그리고 꿈속에서 무수히 많이

신발을 잃고 난 요의(尿意)를 느끼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찌 돌아왔을까?

그래도 난 여기 와 있다

 

신발은 매번 발에 맞지 않는다

약간 작은 신발에 엄지발가락은 멍들고

발뒤축은 까져 진물 흐른다

헐거운 발목이 빨아들인 모래는

수많은 이빨이 되고 형극이 되고

발에 맞는 신발도 있었다 딱 한 번

비싸게 주고 산 미제 트레킹화

양복에 신고 나갔다 웃음거리가 된 후

더는 신지 못했다

 

하늘을 나는 꿈을 꿀 때

내가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꿈속에서 때로 물속에 잠겨 허우적거리다

신발을 벗어들거나

입에 물기도 했다

 

신발이 없으면 내가 없다

그래도 나의 신발은 아직 없다

 

 

 

계간 《문파》 202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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