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의 「있다」 해설 / 고봉준
있다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 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문학과사회》 2009 봄, 시집 『훔쳐가는 노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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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할 수 없는 존재
우리는 종종 詩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아니,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때도 ‘시=언어’의 힘이 아름다운 우리말이나 그럴듯한 수사적 표현과 같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언어의 ‘미학’은 아름다운 말이나 멋진 구절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산문과 달리 시의 언어가 갖는 ‘힘’은 그것이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 때로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상태나 심리 등을 언어로 표현하는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며, 이때의 언어는 의미의 층위가 아니라 느낌, 뉘앙스, 사유 등 학문적•문법적인 것과는 다른 층위에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은영의 「있다」라는 시는 이러한 시의 속성에 대한 증거이다.
‘있다’라는 단어는 존재(론)의 언어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표현할 때 ‘있다’라는 단어를 쓴다. 이 경우 ‘있다’는 有, 즉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그 반대말은 無,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에서 Be 동사의 현재형이 ‘있다’와 ‘이다’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듯이 ‘있다(be)’라는 단어는 주어의 상태나 위치 등을 표현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요컨대 ‘있다’라는 단어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그리고 주어의 상태나 위치 등이 동시에 포함된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학적 지식은 이 시의 매력과는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시는 이러한 상식의 경계를 벗어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1연에는 ‘있다’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한다.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와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에서 ‘있다’는 주어의 상태나 위치를 표현한다. 그렇다면 세 번째(“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에서 ‘있다’는 어떨까? 두 가지 모두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즉 여기에서 ‘있다’는 단순한 사실의 표현일 수도 있고 ‘없지 않다’라는 의미에서, 또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기 위해서 쓰였을 수 있다. 그렇다면 3연 이하에서는 어떨까? 가령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라는 진술에서의 ‘있다’도 단순한 사실의 표현일까? “여기에 네가 있다”라는 진술이 거느리고 있는 진술들을 살펴보자.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와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남무 노란 꽃가루”,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과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는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와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일상적 감각에 비추어 보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관계없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감각/지각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있다-없다’라는 존재론적 판단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지향이 개입된 가치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이러한 가치판단으로서의 ‘있다’는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라는 마지막 행에서 한층 분명해진다. 이때의 노래는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이다.
고봉준(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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