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The Scream*
정채원
벽장에 넣어둔 가방이
새벽까지 뒤척거린다
가방 안에는 백 년 묵은 얼굴
뭉크 전시회의 입장권
카푸치노 두 잔의 영수증
버려도 버려지지 않고 이따금 기지개를 켜는
기억의 올이 지금도 풀리고 있는지
휘갑치기, 사슬뜨기
더 이상 올이 풀리지 않게
바세린을 발라 둔 단면이 있다
자꾸 갈라지고 터져 피 흘리는
끝단을 쓰다듬는 밤
절규(Scream) 이후
귀를 틀어막아도
하늘 너머 또 어떤 하늘이
꿈틀거리며 밀물지고 있는지
한 바늘씩 혹은 두 세 바늘 건너
휘갑치기, 사슬뜨기
더 이상 올이 풀리지 않게
* Edvard Munch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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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의 전시회 ‘Beyond The Scream’을 다녀왔다. <절규>를 기억하는 전시회 제목으로 ’절규 너머‘를 택한 것은 큐레이터의 권리겠지만, 이를 시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정채원의 고유한 선택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전시회의 기획 의도에 공감했음을 시사한다. 내면적으로도 “하늘 너머 또 어떤 하늘이/꿈틀거리며 밀물지고 있는지” 절규 이후를 염려하는 시적 심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올이 풀리지 않게” 휘갑치기와 사슬뜨기를 계속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벽장에 넣어둔 가방이/새벽까지 뒤척거린다”. 그리고 가방 안에는 ‘백 년 묵은 얼굴’인 뭉크 전시회의 입장권과 카푸치노 두 잔의 영수증이 들어 있다. 뭉크와 시인을 연결하고, <절규>와 ‘기억의 올’을 연결하는 입장권과 영수증은 끊임없이 호응하면서 “새벽까지 뒤척거린다”. 뭉크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표현한 <절규>속 붉은빛의 율동과 ‘절규하는’ 한 인간의 둥근 얼굴처럼 ‘뒤척거린다’.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 버릴지 모른다” (이승하, 「화가 (畵家) 뭉크와 함께」 ). ‘절규하는’ 혹은 ‘절규할 수밖에 없는“ 세계의 음성을 말더듬이의 육성으로 구현해낸 이 작품을 꽤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정채원의 「Beyond The Scream」 역시 '기억의 올’이 더 이상 풀리지 않게 ‘뒤척거리는’ 내면의 풍경을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올이 풀리지 않는’ 시편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홍(시인, 문학평론가), 『문학청춘』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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