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底棲
이현승
여기 한 권의 책이 누워 있다.
거리의 책, 이슬에 젖은 디오게네스의 책,
바람벽을 등지고 앉아 겨울 햇살을 쪼이는 책,
쪼그리고 앉아 꽁초를 주워 피우고 있는 책,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듯
잘 읽히지 않는 눈빛을 가지고 있는 책,
두께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책,
난해하다기보다는 난독인 책,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심연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책,
바닥 아래의 바닥, 심연 너머의 심연을 간직한 책,
처음부터 삶이 죽음의 젖을 빨며 자라듯
죽음에 잇대어진 삶의 책,
거리의 책,
빈자이며 철학자이고 성자인 한 권의 책이
너덜너덜 해진 책이 한 권
여기 하늘을 덮고 누워 있다.
계간 《시인시대》 2025 겨울호
다시 읽는 짧은 시 깊은 울림
----------------------
이현승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할이라는 생각』『대답이고 부탁인 말』.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지도를 빌린다/윤성택 (0) | 2026.02.21 |
|---|---|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베르톨트 브레히트 (0) | 2026.02.14 |
| 버려진 파밭이 이긴 것 같다/정혜영 (0) | 2026.01.24 |
| 위성주의보/박남희 (0) | 2026.01.23 |
| 추리 소설/이장욱 (1) | 2026.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