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이제니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진다. 가지 하나조차도 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낮이다. 두 팔 벌려 서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길가 작은 웅덩이 위로 몇 줄의 기름띠가 흐르고 있었다. 몇 줄의 기름띠 위로 작은 무지개가 흐르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번지고 있었다. 한 장면 두 장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과 여백이 겹쳐지는 하늘이다. 흰색과 푸른색이 펼쳐지는 몸이다. 귀를 기울여 익숙한 소리들을 걸러낸다. 어떤 말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고요한 것들이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고받는 이야기의 기본적인 구조를 숙지하고 있습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낯선 것일수록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울 수 있습니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마음 속에 간직해온 얼굴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돌은 모든 것을 보고 돌은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말들 위로 이끼가 내려앉는다. 너와 나라는 두 개의 문이 열린다. 가지가 가지로 이어지듯 목소리가 목소리로 이어진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바닥에는 몇 개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죽은 것이 죽은 것으로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간다. 흐르고 있는 그림자를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 하나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환한 빛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과 함께 둥글게 깎이고 있는 돌을 본다. 당신을 만나는 심정으로 돌을 만난다.
—《발견》201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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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아마도 아프리카』『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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