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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신용목의 「흐린 밤의 지도」해설/ 조강석

Beyond 정채원 2015. 8. 31. 21:03

신용목의 「흐린 밤의 지도」해설/ 조강석

 

 

흐린 밤의 지도

 

   신용목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말이었으나 무리를 잃은 흰 날개의 메아리였다가 어느새 죽은 별들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안개처럼

 

골목은 간밤의 신열로부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식탁에 흩어놓은 약봉지 같다

 

내 안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는 대답을 막기 위해 밥을 먹어야 했다

내 귀의 구멍으로 밤을 구겨넣고 간

네 목소리의 아침

 

누군가 느낌을 담아가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부엌까지 비닐봉지에 비린내를 담아가듯 꿈과 꿈 사이로 이어진 생활을 지나가려고

누군가 내 뺨을 후려치고 그 손을 내 손목에 달아놓았는지도 모른다

 

이 기분이 새지 않는다

 

골목에 별들의 지문이 잠기는 방향으로 휘감겨 있다 손목에서 빙빙 돌아가는 비닐봉지

이제 너는 안개 속으로 손을 넣지 않는다 축축하게 식어가는 밤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왜 꿈에는 귀가 없을까? 아무리 소리쳐도 꿈속까지 들리진 않는데 왜 꿈에서 속삭이면 꿈밖까지 들릴까? 골목에서는 질문을 멈추게 하는 알약이 팔리지만

여기서 외로움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응 나 여기 있어

별에서 막 흘러내린 안개처럼 자글거리는 조기를 뒤집어야 할 때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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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목 시인은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쓰는 동년배의 시인들과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리듬 속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시를 써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설명은 불충분해 보인다.

 우선 그의 시에는 재래의 서정시와는 달리 타자와의 화합이나 화해가 전제되지 않는다. 초기 작품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이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새롭게 기술하는 데 있어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었던 그는 점차 타자와 자신의 접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를 서정성과 사회성의 길항이라는 말로 풀어도 좋을 것이다. 세계가 온전히 관찰과 노래의 대상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시인의 심회가 언제나 자발적으로만 움직여가는 것도 아니다. 언어 자체가 동시대의 환경 속에서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기에 언어를 매개로 하는 서정시가 사회와 완전히 별개의 리듬으로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시의 근본조건이다. 신용목의 중요한 실험은 바로 그 지점에서 행해진다.

 신용목은 일체의 과장법이나 엄살 없이 세계와 자아의 연동이라는 문제를 내밀한 언어로 집요하게 탐문하는 흔치 않은 시인이다. ‘흐린 방의 지도’는 세계와 자아의 성급한 화해로 마무리되곤 하는 재래의 서정시와는 달리 일상의 소소한 모습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에 기초해서만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비닐봉지에 담긴 비린내가 꿈과 생활의 선후관계를 묻는 계기가 된다. 미리 주어진 어떤 잠언이나 성찰이 없이 경험의 테두리 내에서 태동하는 이런 사유를 통해 그는 21세기의 서정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조강석 (문학평론가)

 

신용목=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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