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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김안의「디아스포라」해설/ 박상수

Beyond 정채원 2015. 8. 31. 21:04

김안의 「디아스포라」해설/ 박상수 

 

디아스포라

 

   김 안

 

 

어머니, 당신은 나의 말 바깥에 계십니다. 그곳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이곳의 하루는 멀고 지옥은 언제나

불공평합니다. 어제까진 입을 벌리면 눈먼 벌레들

쏟아지더니 오늘은 모래뿐입니다. 나는 죽은 쥐의 가면을 쓴 채

부푼 샅에 손을 넣고선 나의 오래된 방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립니다.

어머니, 당신은 나의 모어(母語)로는 쓸 수 없는 것들입니다.

꽃밭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꽃은 여전토록 아름답습니다.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나는 쓸 수 없습니다. 저 꽃을 어떻게 죽여야 합니까?

그러나 당신은 이토록 아름다운 붉은 꽃들을 토하며 어디에서든 나타납니다.

어머니, 당신의 모국어는 너무나 낯설고, 매일이 사육제인 것처럼

나의 말 바깥에서 웅얼거리는 모국어의 서늘한 빛살이 간절하게

방 안으로 쏟아집니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에도

나름의 규칙과 나름의 관계들이 있습니다. 매일 밤 나의 말을 받아 적고 있는

또 한 명의 어머니는, 또 누구입니까? 내 말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나는 누구의 모어와

관계하고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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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안의 시는 지옥도와 같은 장면을 보여준다. 미당문학상 후보작들을 읽고 나면 전쟁과 역병이 휩쓴 중세의 어느 마을을 통과한 기분이 들 정도다. 살과 피가 썩는 장면은 예사다. 비탄에 빠진 사람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의 시는 기이하고 섬뜩하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적 삶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은 우리 시대에 대한 암시로 읽을 수 있다. 김안의 시는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부조리한 말들을 모아놓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해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세계’를 어떻게든 책임지려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힘을 갖지 못한 시인은 어떻게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오직 하나, 기도가 있을 뿐이라고 김안은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신을 향해 탄원한다. 자비를 베푸소서. 부디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그러나 기도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언어가 무기력한 혼잣말 같다는 합리적 의심에 사로잡힌다. 그 의심 때문에 절망하지만 절망은 더욱 간절 한 기도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관념성이 강하고 허공에 뜬 말 같다.
   시 잘 쓰는 시인은 많지만 김안처럼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책임지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점이 예심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고통받는 현실주의자이지만 동시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기도하는 시인이다.

박상수(시인·평론가)

김안=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인하대 국문과 박사 과정. 시집 『오빠생각』 『미제레레』.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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