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연표(年表)/ 김경미

Beyond 정채원 2016. 1. 4. 00:37

연표(年表)

 

   김경미

 

 

 

 

그가 내 가슴에 복숭아를 던지던 구석기시대가 있었고

내가 그의 가슴을 찌르던 철의 시대도 있었다

 

연잎처럼 큰 편지가 소리 없이 타버리던

종이와 성냥의 시대가 있었고

 

어금니가 아픈 탈락과 취소의 시대도 있었다

긴 복도에는 늘

목례와 악수와 끄트머리 어둠과 귀신이 서 있었다

 

빙하기가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왔다 가는 사이에

나무들은 톱밥이 되거나 새가 되고

나는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 되었지만

그래서 추위를 더 잘 피했다

 

매일 뭐든 옮겨놔야 살 것 같던

변덕의 시대도 가고 나면

꼼짝도 않는 추억들을 다 무슨 수로 막겠는가

 

잡을 수 있었던 것들도 미끄러져 나가는 시간의 시대는

언제까지나 되풀이되겠지만

 

지금은 혹은 검정 비닐의 시대

안에 든 것들을 다 허름하게 만드는 

 

 

 

                        —《문예중앙》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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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 1959년 경기 부천 출생. 1983년〈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쉿, 나의 세컨드는』『고통을 달래는 순서』『밤의 입국 심사』.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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