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유리의 존재/김행숙

Beyond 정채원 2016. 9. 23. 11:46

유리의 존재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 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 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계간 『문학동네』 2016년 봄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스크림과 늑대/이현승  (1) 2016.10.10
파울 클레의 관찰일기/진은영  (0) 2016.10.02
수입품 상점/하재연  (0) 2016.09.19
시간의 충돌/정숙자  (0) 2016.09.19
주사위를 던지다/최서진  (0) 2016.09.19